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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선공 k의 어처구니 없는 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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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선공 k의 어처구니 없는 시

Guanah·Hugo 2024. 2. 22. 17:38

출처 :  커피통 2019' 호반인문학 | BAND

 

이것은 영원히 미완일 엽신
이것은 아직 부치지 않은 엽신
이것은 천년 후에야 간신히 미완인 채 도착할 엽신
이것을 끝까지 읽지도 않겠지만
이것을 끝까지 읽을 수도 없겠지만
이것을 끝까지 읽었다면 어떤 병증의 초기 증상일 터...


*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이자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이자 율란통신 에스프리 편집장 무사 강돌이자 영화감독 오랑캐 이 강이기도 한 그러나 끝내 시인인 박정대 형에게 / 박제영



제1신. 창백이라는 말

3월입니다 오늘은 내가 아는 박정대 중 누구에게 서신을 띄울까 아침부터 고민하다 해가 뉘엿뉘엿하니, 에라 모르겠다 아무나 읽겠지 무작정 씁니다 봄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도 아닌 삼백예슨 날 오롯이 이절 오랑캐의 계절에서 형은 오늘도 자작나무로 살고 있는 체와 만옥과 자무시와 함께 자작자작 음악을 태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형과 함께 기획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용한 혁명, 율란통신 에스프리 첫 번째 책이 곧 나올 테지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3월의 끝에서 만나는 율란yulan 그러니까 창백한 백목련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창백蒼白이라는 말은 백목련과 만났을 때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테지요 형과 함께하는 이 무용한 혁명의 끝은 또 얼마나 창백할까요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울까요 생각만으로도 벅찬 하루해가 저리 격렬하게 지고 있습니다


제2신. 밤새 우레와 폭우가 퍼붓는 동안 일생이 지나가버린다 해도

천둥과 번개 그리고 폭우가 퍼붓는 밤입니다
오늘도 밤을 새우며
누군가의 문장을 수선하는 중입니다

낡아서 너무 무르거나 너무 성긴 문장들
가령 당신을 죽도록 사랑해 혹은 사랑해서 당신을 죽일 거야 같은

새로워서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빡빡한 문장들
가령 모든 사랑의 자백은 허위이고 다만 이별의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같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배반과 음모의 문장들
아니 이율배반의 문장들을 수선하다가
하릴없이 일생을 낭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 우레와 폭우가 퍼붓는 동안 지나가버릴 일생일지도 모릅니다

바깥 덧문이 삐걱거리더니 바람이 새어들고 비가 들이칩니다
낡은 가죽 같은 문장들을 잠시 밀쳐놓고 형의 문장을 꺼내 읽습니다
안락의자와도 같은 흔들의자와도 같은 형의 문장에 퍼질러 누워
고요한 이절을 떠올립니다
이절에 스스로를 유배한 형을 떠올립니다
언젠가 보내올 형의 뜨거운 문장을 떠올립니다

밤새 우레와 폭우가 퍼붓는 동안 일생이 지나가버린다 해도
여한이 없을 그런 문장 말입니다


제3신. 나의 하루는 천년처럼 멀고

형의 문장으로 지을 시집과
형의 문장으로 올릴 산문집을 기다리는
하루는 천년처럼 멀고
더디지만
문득 십년 후를 생각하면
눈 깜짝할 새였겠다 싶습니다

이절은 멀고
삼절은 오지 않았는데
사절을 먼저 떠올리는 기묘한 날들입니다


제4신. 실패한 문장

형의 주말은 어떤 색일까요?
월간 <춤>지에 보낼 원고를 써야 하는데
마감이 내일인데
도무지 감感이 잡히질 않습니다
더워도 너무 더운 탓일 겁니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노래
<황혼길>을 틀어놓고
문인수 선생의 시집을 꺼내 읽다가
「머위」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이번 원고는 장사익과 문인수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만들어질 듯합니다

어떤 것은 시가 되고
어떤 것은 음악이 되고

지난날 대부분의 문장은 실패하기 일쑤였습니다
시는커녕 음악은커녕 소음에 불과했습니다

​아마도 이번 생에는
소음과 음악 사이 그 언저리쯤에서 마감할 듯합니다


제5신. 지속가능한 슬픔

누군가는 자본의 카니발이라 명명하지만
실상은 자본의 몬도가네Mondo Cane이지요
개 같은 세상, 개가 되어, 컹컹 짖어대는 무리들 속에서
개가 될 것인지 사람이 될 것인지
늘 선택의 기로에 선 기분입니다

우리는 늘 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늘 질 수밖에 없는 운명, 이 얼마나 가련한 운명입니까
패배할 수밖에 운명이라니요!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패배가 지속가능한 슬픔을 가져다 줄 테니까요
그러니 패배 속에서 슬픔 속에서
마침내 시의 카니발을 열어야겠지요

슬픔이 마침내 지속가능한 시가 되기를
그것만이 어쩌면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6신. 무용한 혁명의 시작

형이 꿈꾸었던 율란통신 에스프리 첫 번째 책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도 끝내 미약하기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끝내 실패하기를, 시집인 듯 시집이 아닌 듯, 잡지인 듯 잡지가 아닌 듯, 문학인 듯 문학이 아닌 듯, 예술인 듯 예술이 아닌 듯, 손에 잡힐 듯 손에 잡히지 않는, 이것은 무엇이다 명명하는 순간 사라지는, 누군가는 이 책을 읽겠지만 누군가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책이 첫 책이듯, 세상의 모든 페이지가 첫 페이지이듯, 매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예술의 고아들을 위한,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용한 혁명이 마침내 시작되었습니다


제7신. 프루콩 프루콩 피크시르포크 흩날리는 밤

초저녁 점점이 내리던 눈이 어느새 프루콩 프루콩 눈송이로 흩날리는 지금은 자정입니다

형의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을 읽다가 150여 년 전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친 몽테스키외를 떠올리는 밤입니다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모든 저작물에 이렇게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Charles-Louis Joseph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샤를 루이 요세프 드 세콩다 바롱 드 라 브레드 에 드 몽테스키외

형의 서명도 만만치 않지요 아니 오히려 더 심하게 길지요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이자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이자 율란통신 에스프리 편집장 무사 강돌이자 영화감독 오랑캐 이 강이면서 끝내 시인인 박정대

몽테스키외가 쓴 『법의 정신』을 로마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했듯이 어쩌면 형의 모든 시집도 마침내 금서로 지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행이론처럼 말입니다

에스키모인들이 쓰는 말에는 눈이라는 단어가 없다지요
내리는 눈 카나 쌓인 눈 아푸트, 바람에 날리는 눈 피크시르포크는 있어도 그냥 눈은 없다지요
오늘은 그러니까 피크시르포크가 흩날립니다
피크시르포크가 프루콩 프루콩 흩날리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청담하이볼로 가야겠습니다

오늘의 와인은
<까스티용 꼬뜨 드 보르도, 샤또 꽈트르 리유>로

오늘의 안주는
<삐쓰까또레 부르쥬미 첼라햄 페스츄리 치즈나쵸 스트링 스파게티>로

오늘의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의 <농, 줘 너 리그레뜨 리앙>(난 후회하지 않아)로 하겠습니다


제8신. 애인의 안부를 묻는 동안 아흔아홉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시집 속에서 오랑캐 이 강은 춘천의 의암호를 거뜬히 리스본의 타호강으로 바꾸고, 죽은 랭보를 거뜬히 살려내어 에피오피아의 히라르에서 뜨거운 커피를 함께 마시지만

시집 속에서 오랑캐 이 강은 세상의 모든 국경을 허물고, 때로는 핀란드의 국경수비대원과 톱밥난로에 언 손을 녹이고 밤새 담배를 피우고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혁명을 꿈꾸지만

밤새 허리를 화학적으로 앓던 형은 이제 리스본을 떠나야 하는데, 시집 바깥에서 형은 마법을 잃어버린 한 마리 가여운 짐승일 뿐이니 스스로 석양 되어 저물려 하는데

시집 바깥에서 나는 형을 위로하거나 어루만질 단 하나의 문장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어떤 위무의 문장도 형에게 닿지 못하리란 것을 세상의 모든 실패한 연애들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상에 추락한 전직 천사의 서러운 숙명일 테지요
애인의 안부를 묻는 동안 아흔아홉 번의 겨울이 지나갈 테지요
아흔아홉 번의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아흔아홉 번 무너질 테지요
형이 아흔아홉 번 무너지도록 애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을 테지요
백 번째 눈송이가 이절에 내릴 때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이별의 징후일 테지요

시집 바깥으로 시인이 걸어 나올 때 오랑캐 이 강은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지우는 사이로 여명이 밝아옵니다

오랑캐 이 강이 만들어낸 리스본은 다시 춘천이 되고, 타호강은 다시 의암호가 되어 흐릅니다


제9신. 세상에서 가장 유력한 무력

영화 <서울의 봄>이 장안의 화제입니다 실패하면 반역이고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라는 막말이 인구에 다시 회자되는 요즘입니다

타락한 무력武力의 세상에서 가장 무력無力한 존재가 어쩌면 시인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형을 떠올립니다

세상의 모든 타락한 무력武力을 무력無力의 시로 혁명하는 오랑캐 이 강, 형의 시는 세상에서 가장 유력有力한 무력無力이지요

굳이 부연하자면 무력無力하기 때문에 무위無爲하고 무욕無慾하고 무애無礙하고 무한無限한 혁명입니다


제10신. 기타 담배로 만든 시

보헴 시가 No.6는 보헤미안 박정대의 담배입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붉은색 체 게베라 지포 라이터가 형의 라이터이듯이 말입니다

​형의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를 처음 읽었을 때, 그때의 두근거림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음악 같은 햇살, 음악 같은 빗줄기, 음악 같은 는개… 그런 날이면 여전히 격렬비열도의 파도가 출렁입니다

그런 날이면 보헴 시가 한 개비와 커피 한 잔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의 형을 떠올리곤 합니다

편의점을 들러 보헴 시가 No. 6를 한 보루 사서 우체국으로 갑니다 작은 박스에 담배를 담고 포장한 다음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적습니다
― 달아실 문장수선소에서 일하는 문장수선공이 오랑캐의 계절, 이절에 사는, 아직 오지 않은 삼절과 사절의 시를 살고 있는 보헤미안 시인에게

​그러고 나면 이절에서 형의 답신이 올 테지요
― 이절의 오후는 평화스럽다 못해 괴이하고 달콤하게 고독하다
― 나는 영원히 이 박스를 뜯지 않을 거야

음악이 없거나 음악만 있는
눈물이 없거나 눈물만 있는
의미가 없거나 의미만 있는

양극단의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지리멸렬한 날들이지만, 그 지리멸렬함이 오히려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니, 모순이야 말로 새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 없는 노래와 눈물 없는 슬픔과 의미 없는 문장이 자라는, 오랑캐의 계절에서 우리 다시 만날 테지요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서 이 엽신이 형에게 닿았다면 어느새 천년이 지났을 테지요

- 『천년 후에 나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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