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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의 꽃香詩향] 악마의 나팔과 천사의 나팔

Guanah·Hugo 2023. 12. 12. 21:24

출처 : 커피통 2019' 호반인문학 | BAND

 


집에서 사무실까지 걷다보면 크고 작은 제법 많은 꽃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 아래마다 시에서 이런 저런 꽃들을 심어놓기도 했고,
골목골목마다 집 앞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놓은 집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아침저녁 출퇴근할 때마다 꽃들이 마중하고 배웅하는 것 같아 기분이 절로 좋아지곤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 꽃들 중에서 올해 유난히 자주 눈에 들어온 꽃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거든요.
바로 악마의 나팔(꽃)입니다.
천사의 나팔처럼 생겼지만 악마의 나팔입니다.


악마의 나팔이나 천사의 나팔이나 같은 “독말풀”이라는 같은 종의 식물이고,
둘 다 커다란 나팔꽃처럼 엇비슷해서 꽃의 모양새로 구분하기는 어려운데,
자세히 보면 몇 개의 다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꽃의 색깔이 다릅니다.
악마의 나팔은 흰색인데,
천사의 나팔은 노란색(주로 노란색이지만 연분홍 등 다른 색깔도 있습니다)이지요.
둘째 꽃의 피는 방향이 다릅니다.
악마의 나팔은 고개를 뻣뻣이 들어 올리듯 하늘을 향해 피고,
천사의 나팔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듯 땅을 향해 핍니다.
셋째 열매의 모양이 다릅니다.
악마의 나팔은 둥그런 모양에 가시 같은 게 돋아나 있어 커다란 아주까리 열매처럼 보이고,
천사의 나팔은 기다란 모양이 고추처럼 보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악마의 나팔꽃과 천사의 나팔꽃을 이렇게 간단히 구분해놓았더군요.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 악마의 나팔꽃(Devil’s Trumpet)
학명: 다투라(Datura)
흰독말풀,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가지과 독말풀속 다투라종 한해살이풀

■ 천사의 나팔꽃(Angel’s Trumphet)
학명: 브루그만시아(Brugmansia)
독말풀,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가지과 독말풀속 브루그만시아종 상록관목
 
독말풀이라는 것은 독을 가졌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
당연히 두 꽃 모두 맹독 성분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 독성분을 이용해서 마취제로 쓰이고 한약재로도 쓰인다고 하지만,
함부로 만지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약과 독이 동전의 양면이듯 천사와 악마 또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같은 독말풀이지만,
악마의 나팔꽃은 다투라로 불리고 한해살이풀이라는 점,
그리고 천사의 나팔꽃은 브루그만시아로 불리고 풀이 아니라,
나무(상록관목)라는 점을 기억해두시면 헷갈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더 글로리>를 기억하실는지요.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드라마인데,
배우 송혜교가 피해자인 문동은 役을 맡았고,
배우 임지연이 가해자인 박연진 役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더 글로리>는 여러 장의 포스터를 보여주지요.
포스터마다 등장인물들 한 명씩 등장하는데,
그 배경에 노란색의 천사의 나팔꽃 혹은 흰색의 악마의 나팔꽃을 배치시켜 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제작진의 의도에 따른 것일 테지요.
포스터의 해당 인물이 악마인지 천사인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 테지요.

악마의 나팔꽃 하면,
사실 저는 흔히 ‘꽃과 사막의 화가’라 불리는,
미국의 여성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를 떠올립니다.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클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는 뉴욕에서 화랑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보자마자 “이제야 제대로 된 여성 화가가 나타났다”고 평했고,
그녀의 그림을 자신의 화랑에 전시하지요.
그렇게 미국 화단에 처음 등장한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와 연인이 되는데,
이런 얘기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더 하기로 하고,
아무튼 오키프가 주로 그렸던 그림이 바로 ‘칸나’와 ‘흰독말풀(악마의 나팔)’입니다.
(칸나 얘기를 하면서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를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키프의 그림 중에서,
201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495억 원에 팔린 작품이 바로 <악마의 나팔꽃>이었지요.

그렇다면 천사의 나팔 하면 떠오르는 시는 뭐가 있을까요?
저는 류인서 시인의 시를 떠올립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꽃이지요
노란 천국이 꽃 속에 그득 차면 한 번씩
노란 소리로 꽝, 꽝, 쏟아내야 하는

천사의 나팔에는 날개가 없지요
이 깊고 둥근 금관(金管)의 소리로 저녁을 깨우기 위해서는
나팔을 불어줄 천사들의 숯불 입술이 있어야 해요
꽃주둥이 뜨거운 나팔만 주렁주렁 가지에 걸어두고
천사들 어디로 도망했나요

쏟아지는 향기의 화염을 보아요
환청의 나팔소리 땅으로 스며 마당은 기어이, 들썩이는 지옥이네요
죽은 자들이 깨어나요
대지의 관뚜껑을 젖히며 숨가쁘게, 헛것 같은 푸른 것들이
― 류인서, 「천사의 나팔꽃」 전문


천사의 나팔꽃이 사방 천지에 피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사방 천지가 지옥이랍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대도 인간의 세계는 어찌 된 일인지 지옥의 불구덩이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는 어떨까요?


게슈타포는 아우슈비츠에서 퇴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꽃병의 물을 갈고는
브람스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이네의 연시戀詩를 읊었다 그리고
다음날 더 많은 목숨을 가스실로 보냈다
― 김규성, 「아름다운 시」 전문


한 사내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막 직장에서 집에 돌아온 참입니다.
꽃병의 물을 갈아주고는 턴테이블에 브람스의 엘피를 올려놓습니다.
<클라리넷 3중주 A단조 Op.114>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조용히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를 읊조리기 시작합니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쓸쓸함으로 그려내는 가을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이게 하소서”
꽃과 브람스의 음악과 하이네의 시를 사랑하는 이 사내는, 이 사내야말로 ‘천사’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의 직업이 뭐였던가요?
그가 어디서 퇴근했던가요?
나치 비밀경찰(게슈타포)인 그는 오늘도 하루 종일 바쁘게 일했습니다.
직장인 아우슈비츠에서 수백 명을 가스실로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내일 더 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려면, 지금은 쉬어야 합니다.
꽃에 물을 주고 음악을 듣고 시를 읊으며, 하루의 피곤을 털어내고 내일의 고된 일과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천사인 줄 알았던 사내가 알고 보니 ‘악마’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라고 시인이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고영민 시인의 시 「은행나무 사거리」입니다.


뒤에서 누가 당신을 부른다면
당신은 어느 쪽으로 돌아보나요

왼쪽인가요
오른쪽인가요

당신이 돌아본 왼쪽은 어느 쪽인가요
당신이 돌아본 오른쪽은
어느 쪽인가요

그 둘 사이는 얼마나 먼가요

뒤에서 누가 당신을 부를 때
한참을 따라와 당신을 부를 때

너 지선이 아니니?
물어올 때

당신은 장바구니를 든 채
우두커니 멈춰 서서
되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내게서 본
여자가 누구일까, 문득
궁금해지고
어쩜 내가 지선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 고영민, 「은행나무 사거리」 전문


“악마의 나팔과 천사의 나팔”을 얘기하면서,
‘왜 뜬금없이 악마의 나팔꽃과 천사의 나팔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김규성의 시 「아름다운 시」와 고영민의 시 「은행나무 사거리」를 꺼낸 것일까?’
어쩌면 당신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은 오늘 제가 진짜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꽃 얘기가 아니라 천사와 악마는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인격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앞서 김규성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 천사와 악마 두 개의 인격을 모두 갖고 있듯이,
고영민의 시에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화자 역시,
자기 안에 자기가 전혀 모르고 있는 ‘지선’이라는 인격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듯이,
우리 안에는 분리될 수 없는 선/악, 천사/악마, 독/약이라는 파르마콘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둘 사이가 얼마나 먼지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천사의 나팔이라고 부르는 그 꽃이 실은 악마의 나팔일 수도 있고,
악마의 나팔이라고 부르는 그 꽃이 실은 천사의 나팔일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함께 나눠보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니 “뒤에서 누가 당신을 부른다면/ 당신은 어느 쪽으로 돌아보나요”라는 질문은,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12월입니다.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지난 계절의 내 얼굴들이 차례로 지워지고 있습니다.
끝내 드러날 내 얼굴은 과연 왼쪽일까요 오른쪽일까요?
당신은요?
당신은 지금 어느 쪽으로 돌아보고 있나요?
(끝)

- 월간 《춤》,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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