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nah觀我Story
서대문 인근 문화유적을 다녀왔습니다. 본문
출처 : (사)국립춘천박물관회 | BAND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은 조선왕조의 한양,
일제 강점기 경성,
현대의 서울을 주제로 과거,
현재의 모습을 전시하여 흥미롭습니다.
한양의 광화문 육조거리는 이러합니다.
70년대 아파트 모습입니다.
옛 기억이 떠오릅니다.
경성 시민들이 타던 전차(근대유산)도 있습니다.
우리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으로 이동했습니다.
광해군때 건립된 경희궁 정문으로 일제시대 궁이 훼철될 때 팔려나가,
광해군때 건립된 경희궁 정문으로 일제시대 궁이 훼철될 때 팔려나가,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988년 현재의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자리는 아닙니다.
(경희궁 해설자료는 맨아래 있습니다.)
정전인 숭정전입니다.
일제는 총독부 자녀들을 위한 중학교를 짓는 등 궁을 훼손하고 여러 건물을 민간에 매각했습니다.
현재 모습은 1980년대 복원된 것입니다. 10%도 채 안되게...
인조이후 철종까지 열분의 임금들이 사용했고 두 임금이 출생하고 여러 임금과 왕비가 승하한,
인조이후 철종까지 열분의 임금들이 사용했고 두 임금이 출생하고 여러 임금과 왕비가 승하한,
조선후기 중요한 궁궐인 경희궁은 사람들의 거억속에 잊혀졌습니다.
'편전'과 영조 어진을 모셨던 '태령전', 신령한 바위 '서암' 영역은 공사중이라 관람이 불가했습니다. 아쉽게도..
점심식사 후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왔습니다.
일대가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철거예정이었으나,
옛 도시를 모두 지워버리지 않기 위하여 도시재생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골목을 따라 도시의 오래된 층위와 풍경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2017년 새문안 동네는 '돈의문박물관마을'로 태어났고,
이 일대의 역사와 장소,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저장하는 현장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입니다.
1396년(태조 5) ‘의를 두텁게 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돈의문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곧 헐립니다.
1422년(세종 4) 현재의 ‘돈의문 터’에 다시 지어졌고,
1422년(세종 4) 현재의 ‘돈의문 터’에 다시 지어졌고,
이때부터 돈의문은 신문(또는 새문)이라고 불렸습니다.
돈의문 도로는 신문로(새문안로)로,
돈의문 도로는 신문로(새문안로)로,
그 안쪽 동네는 자연스레 새문안 동네로 불렸습니다.
경교장에 왔습니다.
최창학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되었습니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김구선생이 저격당한 방입니다.
저격당시 입었던 저고리입니다.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창문을 관통한 총탄 흔적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선생의 집무실입니다.
김구선생 사망후 이 집은 타이완 대사관저, 남 베트남 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였고 병원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후 내부가 복원되었습니다.
경희궁(慶熙宮, 西宮, 국가사적) 해설자료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으로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영조·순조 세 임금과 인헌왕후·인경왕후 등 다섯분의 왕비가 승하했으며,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한 곳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심 무대로 어느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직한 곳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심 무대로 어느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직한 곳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으르 동궐이라고 부르고 그와 짝을 이뤄 경희궁을 서궐이라 부르며,
인조이후 역대 왕들이 당시 법궁인 창덕궁과 이곳을 번갈아가며 정무를 보고 생활하였던 것에서 알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꼽히던 경희궁은 사라진 궁궐이 되어 버렸다.
이 궁은 1616년(광해군 8)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꼽히던 경희궁은 사라진 궁궐이 되어 버렸다.
이 궁은 1616년(광해군 8)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이자 차남으로 임진왜란중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던,
1608년 행궁이었던 경운궁(후일 덕수궁)에서 불안한 등극을 하게 된다.
즉위후 광해군은 종묘와 창덕궁 중건을 추진하여,
1615년(광해군 4년)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임진란으로 파괴된 법궁을 비로소 갖추었다.
광해군 8년,
광해군 8년,
인왕산 ‘새문동(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후일 인조의 아버지로 ’원종‘으로 추존)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술사들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궐을 짓도록 명한다(경덕궁, 훗날 경희궁).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불안했던 광해군의 선택이었다.
1623년 3월 12일 경덕궁으로 이어를 준비하던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새 궁궐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비운의 길을 걷게된다.
경덕궁은 인조 이후 청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머물며 왕궁의 역할을 하게된다.
경덕궁은 인조 이후 청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머물며 왕궁의 역할을 하게된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창경궁이 파괴되어 경덕궁에서 9년을 살았다.
이로서 경덕궁은 이궁(離宮)의 지위를 갖게되었고,
동궐에 대비되어 서궐이라 불리면서 조선왕조의 대표 궁궐이 되었다.
이 궁궐은 7만여평의 자리에,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태령전(영조 어진) 등 120여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특징은 건물의 배치가 경복궁, 창경궁과 매우 다르다.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나란히 놓이고 정문은 오른쪽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들어갈 때 내전의 앞을 먼저 지난뒤,
오른쪽으로 꺾어 나가야 외전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법궁보다 형식의 얽매임이 덜하고 비좁은 터를 실용에 맞게 자유롭게 활용했다.
고종이후 궁궐로의 위상과 기능을 상실했다.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빈 궁궐이 되었고,
1910년 일제 강점기에는 전각을 헐어내고,
일본인 학교인 총독부중학교(1915년 경성중학교, 해방이후 서울 중·고등학교)를 세운다. 경희궁은 절반으로 축소된다.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일본불교 종파에 매각되었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일본불교 종파에 매각되었고,
다른 전각들로 기숙사나 교실로 사용되었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이토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남산에 세운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파괴는 집요하게 계속되어 궁궐영역에 관공서 관사를 짓거나 일부를 도로에 편입시켰다.
급기야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매각처리했다.
1920년대에 경희궁은 사라졌다.
1978년 서울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민간소유로 넘어갔던 터를,
1978년 서울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민간소유로 넘어갔던 터를,
1984년 서울시가 매입,
발굴조사와 함께 숭전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고,
2022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흩어졌던 전각 중 돌아온 유일한 것은 흥화문으로 1618년 창건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흩어졌던 전각 중 돌아온 유일한 것은 흥화문으로 1618년 창건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현재의 위치로 돌아왔다.
원래자리는 신문로 구세군 빌딩 자리이다.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법당인 정각원으로,
황학정은 사직동에 있다.
<크게 줄어든 현재 경희궁>
<크게 줄어든 현재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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