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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문학, 2023 가을호]_이 계절에 읽는 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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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문학, 2023 가을호]_이 계절에 읽는 시

Guanah·Hugo 2023. 8. 25. 23:44

출처 :  커피통 2019' 호반인문학 | BAND

 


좋은 시는 힘이 세다



#민왕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서」(계간 『시사사』, 2023 여름호, 통권 114호)
#하린, 「기분의 탄생-관찰자」(계간 『시와세계』, 2023 여름호, 통권 82호)
#김정수, 「볕뉘」(시집 『사과의 잠』, 청색종이, 2023)
#김윤현, 「여의도 문법」(계간 『생명과문학』, 2023 여름호, 통권 9호)
#성명남, 「비행과 비행」(계간 『생명과문학』, 2023 여름호, 통권 9호)

흔히 문학인들이 혹은 예술인들이 문학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문구를 인용하곤 한다.
특히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자주 인용하는 문구일지도 모르겠다.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無用)의 유용(有用)”라는 이 문구를 처음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문구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실리 혹은 실용의 측면에 본다면 문학과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시야말로 쓸모가 별로 없겠다.
그런데 그래서 쓸모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실리를 좇다가 실용을 좇다가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들을 문학과 예술이 특히 시가 환기시켜주는 까닭이다.
사람이니까,
사람인 이상,
사람으로서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잊어버려서는 안 될 무엇을 환기시키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예술이고 그리고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여름에 만난 몇 편의 시들은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1.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내 창문 아래로 우는 사람들이 온다

분노로도 안 되고 자책으로도 안 될 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할 때
소리치기 좋은 자리를 골라 많은 말을 하고 간다

나는 다 듣는다 본디 내 말이었던 혀가 꼬인 말들을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데 매번 비슷한 말을 하고
처음엔 화내다가 나중엔 모두 울고 간다

애인은 슬픈 일이라고 하지만 저 말들에 나를 섞어 떠나보내는 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 일주일에 한 번은 속으로 같이 소리치곤 한다

생계와 관계와 사랑이 저를 치고 갔을 때
술 취한 마음은 또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이었나

품위를 말하는 사람이 싫고 위선이 보이는 사람이 싫고
오직 저런 난동 위에서 뼈다귀만 남은 마음만이 가여운 구원을 얻는다

울기 편한 귀퉁이에 집을 얻어
꽁꽁 언 겨울에도 눈물 흘리는 사람들 들러가니

여기는 사시사철 울음이 풍성한 곳, 울음이 풍요로워 떠나지 못하는 곳

― 민왕기, 「목 좋은 곳에 집을 얻어서」 전문


시인 박용하는 일찍이 민왕기를 일러 “민왕기는 그만의 독보적인 말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21세기의 김소월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한다.
나는 언제가 어떤 지면을 통해 “민왕기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감성사전을 펼쳐 본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적이 있으니까.
계간지 『시사사』 여름호를 보다가 역시나 민왕기가 펼쳐내는 문장 앞에서 눈이 멎고 가슴 아래께가 먹먹해지는 것이니,
“시인은 왜 쓸모없는 시 따위를 여직 쓰고 있나?”라는 질문마저 허망해지는 것이니,
그가 듣고 보고 어루만지는 울음들이 그의 시에 기대 다시 용기를 내고 구원을 얻는 것이니,
누가 시를 시 따위라 할 수 있나.
누가 시를 쓸모없다 할 수 있을까.
“여기는 사시사철 울음이 풍성한 곳, 울음이 풍요로워 떠나지 못하는 곳”에 민왕기가 산다.
민왕기가 당신의 울음으로 시의 첫 음절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민왕기가 자신의 울음으로 시의 마지막 음절을 매만지는 곳이다.
그렇게 울음의 저수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쩌면 울음의 몽리면적에 기대어 우리 영혼은 겨우 구원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유치원에서 딸아이가 울면서 돌아옵니다
울음은 착합니다

누군가 엄마가 없다고 놀릴 때마다
아빠마저 없는 것보단 낫잖아
그렇게 소리치라고 차마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한쪽만 있다는 건
불편한 것일까요
부끄러운 것일까요

사라지기 좋은 계절이란 걸 압니다
채팅하던 사람이 자살을 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조문을 가고 싶은데 사는 곳을 모릅니다

나에게 말을 거는 종교 전파자를 가끔 만납니다
귀찮아질 때까지 경청합니다
인상도 좋고 눈도 선한 당신들
최선을 다합니다만
나의 걱정거리가 지천이고
지척인 이유에 대해 말해주지 않습니다

택시를 타면 미터기를 걱정합니다
라디오는 왜 기사가 원하는 주파수만 트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사는 도시는 오후 4시부터 정체라서
불안과 불온이 밀려옵니다

새가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날아갑니다
나무 위 빈 둥지가 불현듯 궁금합니다
알 대신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요

관찰과 관찰자의 차이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내 숨통을 조이는 역할을 타인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한다는 생각

딸아이는 자라면서
관계라는 말도 습득해갈 것입니다
대답이 뻔한 질문들을 다분히 나에게 던질 것입니다
당황하는 척을 하면서
감당해야 할 물정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해줘야 할 것입니다

― 하린, 「기분의 탄생-관찰자」 전문


“기분이 좋아.”
“기분이 나빠.”
“말할 기분이 아니야.”
“기분이 영 찝찝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야.”
“기분이 영 더럽네.”
등등 우리는 자신의 현재의 단기적인 심리 상태 혹은 단기적인 정서 상태를 ‘기분’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다.
그런데 막상 기분(氣分, mood)이란 게 뭘까?
기분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기분을 촉발시키는 유발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기분과 감정과 느낌은 또 어떻게 다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하린 시인의 「기분의 탄생-관찰자」를 읽다가 그만 생각에 골똘해졌다.
불편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에 우는 딸아이,
채팅하던 상대가 죽었는데 그의 주소를 알지 못하는 상황,
나의 걱정이 지천이고 지척인데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고 오직 선교에 열중인 종교전파자,
오후 4시부터 정체가 시작되어 미터기 요금이 올라가는 게,
걱정인 화자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트로트를 틀어대는 택시기사.
화자는 불안하고 불온하기만 하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깡의 말을 조금 비틀자 이런 문장이 된다.
“나의 기분은 타자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비로소 “내 숨통을 조이는 역할을 타인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한다”는 화자의 말이 이해된다.
타자의 시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기분이 탄생된다는 것.
조증도 울증도 화병(火病)도 마침내 자살에 이르는 것조차도 나-타자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
시 속의 화자를 따라가다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3.

저녁 햇빛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산 정상 산책로가 흙을 풀어 웅성거렸고
꽃향기가 길바닥에 풀썩거렸다

내리막길과 아카시아 사이로 어둠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늘진 볕뉘의 계단에
꿀벌 한 마리 눈높이에서 날고 있었다

움직이는 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빠른 정체는 정지해 있었다

지구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투명한 날개만큼
속이 보일 듯 얕은 바람이 불어왔다

총알을 피하듯 몸을 숙여
햇빛과 꿀벌 사이를 내려오는데
전생을 지나오는 듯했다

잠시 멈춰선 세상도 해의 날개처럼 고요했다

― 김정수, 「볕뉘」 전문


김정수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사과의 잠』은 새벽에 잘 읽히는 시집이다.
환한 대낮이 아니라 환한 빛과 뜨거운 열이 힘을 잃고 서늘해진 대지와 공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문장들이다. 시집에서 한 편의 시를 고르기 참 어려울 만큼 편편이 절절하여, 무작위로 한 편을 골랐다. 볕뉘,라는 말 참 좋다.
사실 내가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말 중에 ‘음예(陰翳)’와 ‘믐빛’이 있다.
음예는 본디 “큰 구름이 햇빛을 가려 생긴 그늘”이란 뜻인데,
빛과 어둠이 반죽이 되고 발효가 되고 마침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그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나름 풀고 있다.
오승철 시인이 ”어머니 한 세상은 그믐밤 믐빛이었다“라고 했는데,
믐빛은 그러니까 빛이 없는 빛이고 사윈 달이 다시 차오르는 신생의 기운이라 또한 나름 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김정수 시인의 “볕뉘”를 음예와 믐빛 옆에 두려고 한다.
볕뉘는 “그늘과 그늘 사이에 비친 얇은 빛”이니 이 또한 음예와 믐빛과 같은 계열이지 않겠는가.
삶이란 게 본디 죽음이란 게 본디 음예와 믐빛과 볕뉘에 있음을 저리 환하게 펼쳐 보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우주와 지구와 뭇 생명과 영원과 찰나를 함께/홀로 살고 있음을 저리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4.

종이를 구기면 진보라 하고 접으면 보수라며
빨갛다 어둡다 서로 갉아대는 사이
우리가 타고 갈 버스는 좀체 오지 않았다
간혹 온다 해도 이분법으로 덜커덩거리며 왔다
많은 사람이 멀미가 났다
기름값은 턱없이 비쌌다
저들은 주변까지 벽처럼 견고했고
돌아보면 우리는 늘 변방이었다
이해는 오해로 오해는 이해로
욕설이 뒤죽박죽 우박처럼 자주 쏟아졌다
크륵크륵 코미디빅리그
이태원은 이태원일 뿐
신호등은 빨간 불이 자주 들어왔으나 파란 불이라 믿는다
사탕을 사랑이라 오해하는 날이 종종 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건강했고
비밀리에 표시된 영역이 많았다
가지 않아야 할 곳으로 비행기는 자주 날랐다
그림을 거꾸로 감상하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유물처럼 그대로다
다른 것을 틀린다고 우기는 선량의 거리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법이 자주 바뀌었다
교과서에도 없는

― 김윤현, 「여의도 문법」 전문


“시인은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 시가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듣곤 한다.
시가 당대의 가장 첨예한 정신이고 전위의 정신이던 때가 있었다.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시가 횃불을 밝히던 때가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시는 너무도 멀리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
어느 인터뷰에서 나희덕 시인이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서 ‘목 없는 자’와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신해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와 정치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파수(把守)의 시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요즘,
그래서 김윤현 시인의 시 「여의도 문법」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시의 문법으로 여의도의 문법을 통렬하게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빨강과 파랑으로 편을 가르면서 동이불화(同而不和)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족속들,
멍청하기 그지없는 여의도 족속들이 시의 문법을 제대로 읽어낼지는 여전히 의문이긴 하지만.
여의도 족속들이 판을 치는 세상, 여의도 족속들이 득세한 세상이긴 하지만,
“우리가 타고 갈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있지만, “저들은 주변까지 벽처럼 견고”하고,
“돌아보면 우리는 늘 변방이었”지만,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겠다.
아직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가장 높은 전위에서 매의 눈으로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시인과 시가 우리 곁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5.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검정 비닐봉지가 날아다닌다
방향도 모르면서 잉잉 달리고
초초분분 터질 듯 부풀고 비뚤어진다
질풍노도의 둘째 아이처럼

예측할 수 없이 돋아나는 반항
짧은 잔소리도 싫어 미치겠다는 듯
팔랑 뛰쳐나간다
어어, 하는 사이
인도로 차도로 뛰어들고
제멋대로 비트를 타다가 다시
곤두박질치며
기분이 부추기는 대로 저를 몰라라 한다

쫓는 시선을 따돌리고 멀리 달아나면
녀석에게 불던 바람이 나에게로 불었다
발광發狂하는 마음을 수습하려고 급급했다

서툰 비행飛行과 비행非行 그 어디쯤에서
저도 열심히 크느라고
툴툴 부딪쳐보는 성장 방식
그래 싱싱한 그 뿔로
어디라도 들이받아야 청춘이지

― 성명남, 「비행과 비행」 전문


천사 같던 아이가 악마로 변하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접어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위 ‘중2병’에 걸린 아이.
오죽하면 “북한의 김정은이 남침을 못 하는 이유가 대한민국의 중2들이 무서워서”라는 말이 생겼을까.
아마 시적 화자의 둘째 아이도 지금 중2병에 걸린 모양이다.
화자는 그런 둘째 아이의 변화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사춘기라는 시기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따라주기는 쉽지 않은 것은 비단 화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2병의 아이를 가진 모든 엄마들의 심정일 것이다.
아이 때문에 전전긍긍 속앓이(“발광하는 마음”)하던 어느 바람 부는 날,
화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검정 비닐봉지였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방향도 모르면서 잉잉 달리고/ 초초분분 터질 듯 부풀고 비뚤어”지는 검정 비닐봉지.
“예측할 수 없이 돋아나는 반항/ 짧은 잔소리도 싫어 미치겠다는 듯/ 팔랑 뛰쳐나”가는 검정 비닐봉지.
그러고 보니 둘째 아이가 딱 저렇지 않은가.
그러다 화자는 문득 깨닫는다.
“서툰 비행飛行과 비행非行 그 어디쯤에서/ 저도 열심히 크느라고/ 툴툴 부딪쳐보는 성장 방식/ 그래 싱싱한 그 뿔로/ 어디라도 들이받아야 청춘이지”라고 말이다.
비로소 화자는 둘째 아이와 화해를 할 수 있겠다.
화해를 통해 아이도 병을 극복하고 엄마(화자)도 성장하겠다.


*
서두에 꺼냈던 얘기를 반복하자면,
시가 무용한 게 아니라 ‘무용한 시’가 있을 뿐이다.
좋은 시는 시인도 독자도 한층 성장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좋은 시는 당대의 가장 첨예한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무엇보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
그러니 더 이상 시의 무용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무용한 일이겠다.
좋은 시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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