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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의 숨겨진 보석, 월북화가 이쾌대 본문
출처 : 한국 미술사의 숨겨진 보석, 월북화가 이쾌대 (brunch.co.kr)
이쾌대는 월북화가다. 해금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이름도 알 수 없었던, 아니 알아서는 안 되는 화가였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 4가의 한옥에 살던 중 아버지가 1950년 9월 집을 나가시고, 1957년까지 그 집에 살았어요.
그 집 부엌 천장에 꽤 넓은 다락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못 올라가게 했어요.
그 다락방에 작품이 있었던 거죠.”
“17세 때 다락에 올라가니, 유화 대작은 모두 둘둘 말려 있었어요.
소품들은 신문지를 앞뒤로 깔아 뉘어져 있었죠. 안방 벽장문을 열어야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기에 외부인들은 상상도 못 한 공간이었어요.”
이쾌대의 막내아들 이한구 씨 매일신문 인터뷰 中
기적이다.
40년이 지난 전쟁까지 거친 작품이 고스란히 복원되다니.
사랑이 만들어낸 결실이라고나 할까.
화가 이쾌대의 작품은 그렇게 부인 유갑봉 여사의 손에서 마침내 빛을 보았다.
사랑이 만들어 낸 결실
부인 유갑봉 여사는 수완이 좋았다.
포목상과 택시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혹독한 유신시절 북한으로 넘어간 남편 소식이 들릴 때면 어김없이 형사가 쳐들어왔다.
유갑봉 여사는 수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한번 끌려갔다 오면 어머니는 6개월을 못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당했어요.
저도 한번 끌려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얼마나 끔찍한지 뒤돌아보기가 싫어요.”
막내아들 이한구 씨의 말처럼 유갑봉 여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980년 세상을 떠났다.
1988년 월북화가 해금을 끝까지 못 보고 떠난 것이다.
이쾌대의 작품 속에는 부인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쾌대는 1932년 한동네에 살던 유갑봉과 달콤한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만큼 사랑했고, 창작활동에 큰 영감을 주었겠지.
인물화를 주로 그린 이쾌대에게 아내는 특별한 존재였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내의 모습, 단아하게 앉아있는 모습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이 있다.
심지어 그는 부부가 같이 등장하는 그림에 아내를 앞쪽에 그렸다.
자신은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하고 고운 빨강 저고리를 차려입은 아내를 내세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쾌대는 20세기 한국 미술사에 대표적인 유화가다.
사실성과 민족성에 기반을 둔 그의 작품세계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조형미를 계승하고 있으며, 현대적 미감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은 창조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독도미군폭격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쾌대의 대표작 <군상Ⅳ>다.
독도어민 폭격사건은 미 군정 당시인 1948년 6월 8일 미공군의 폭격으로 오전 독도에서 미역을 따던 어민 150여 명이 숨진 사건이다.
당시 울릉도에서 날아온 12대의 미군 폭격기는 2개 조로 나눠 600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 폭격했다.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5∼8명씩 30여척의 동력선에 타고 있던 150여 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4명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군상Ⅳ>는 폭탄이 터진듯한 연기가 자욱한 배경 속에, 아직도 폭격의 섬광이 남아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좌우의 군상이 서로 대립을 이룬다.
왼쪽 중앙에는 쓰러진 여성을 안고 억척스럽게 걸어가는 남자와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억척스럽게 한 방향을 보면서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의지의 인간상이 같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오른쪽에는 아비규환의 참담함과 혼돈, 절망이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역동적인 산 인간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해방된 나라, 하지만 다시 미군정에 놓인 현실, 그들에 의한 학살은 얼마나 큰 사회혼란과 분노를 안겨주었을지 이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
민족성과 뛰어난 미적 감각
이쾌대의 쾌작,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세세히 보자.
파아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피어오른다.
원경 산수화를 보는 듯 한 구름 속에 묻혀있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과 좁은 논밭으로 짐을 이고 아낙네들이 종종걸음을 하고 있다.
민속풍을 살리면서 유화 색채를 가미한 배경은 정겨운 냄새가 확 풍겨온다.
부리부리한 눈에 숯 검댕이 같은 눈썹, 꾹 다문 입술은 그가 꿈꾸는 이상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눈빛으로 오른손에 든 붓과 왼손에 든 팔레트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당당한 푸른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강토를 딛고 서있는 이 작품은 이쾌대의 모든 것을 표현한 역작이다.
<봄처녀>에서도 원경에 아름다운 우리 강토가 펼쳐진다.
산을 휘돌아 치는 강물과 펼쳐진 산세가 펼쳐진다.
수줍은 듯이 아래를 응시하는 눈망울과 곱게 다문 입술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조선 여인의 미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댕기머리에 살짝 손을 댄 선 분홍빛 저고리, 바람에 날려 굴곡진 몸매가 살짝 드러나는 흰 치마는 예술이다.
그야말로 ‘조선의 모나리자’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쾌대와 이여성
이쾌대는 12살 위의 형, 사회주의자 이여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여성은 3·1운동 직후 중국에서 귀국해 대구학생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해 강력한 항일운동을 했다.
이여성은 일제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던 1944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형성된 건국동맹에 참여한다.
그는 여운형의 오른팔 격이었다.
이여성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한다.
그리고 그는 북한에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간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일성종합대학 역사강좌장(1957) 등의 중책을 맡는다.
또한 미술사 연구도 계속하여 1955년 <조선미술사개요>, 1956년 <조선건축미술의 연구>를 발간하며 북한 미술사학계에 토대를 놓았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이여성의 정밀한 역사적 고증 아래 대형 역사화 <격구(擊毬)>뿐이다.
이여성은 1938년 초에 <청해진대사 장보고>, <유신(庾信) 참마>,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 <악조(樂祖) 박연선생> 12점의 대형 역사화를 완성시켰다.
(레디앙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참조)
월북을 한 이쾌대
형제는 용감했다.
이쾌대 역시 형 이여성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미술의 사슬을 거부했다.
그는 사회주의적 색체가 강한 조선미술동맹에 가담해 서양화부 위원장으로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쾌대는 정전 시기 북행을 택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인공치하에서 활동한 그는 인천상륙 작전 후 북행을 하다 국군에게 체포된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포로 간의 극심한 대립 속에 ‘생존을 위해 북으로 피신하겠다’며 화가 이주영에게 가지고 있던 작품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쾌대는 1965년까지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저자 리재현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이번에도 이 책의 증보판 발행 문제를 료해하시고..
지난 시기 창작공로가 있는 문석오, 리쾌대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숨은 보석 이쾌대.
1991년 이후 ‘월북화가 이쾌대’ 전시가 전국에서 여러 차례 열렸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다시 진행되고 있다.
2013년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도 열렸다.
상실된 한국 미술사의 숨은 보석 이쾌대, 그의 작품은 남과 북 모두에서 가치 있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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