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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쟁의 상흔(글 : 로버트 드레이퍼, 사진 : 유스티나 미엘니키에비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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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쟁의 상흔(글 : 로버트 드레이퍼, 사진 : 유스티나 미엘니키에비치)

Guanah·Hugo 2023. 9. 1. 07:14

출처 :  [오랜 전쟁의 상흔]-내셔널지오그래픽매거진 (nationalgeographic.co.kr)

 

금요 예배 시간을 앞두고 코소보 미트로비차에 있는 바즈람 파샤 모스크 바깥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이 모스크는 1998-1999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파괴된 모스크 부지에 지어졌으며 코소보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다.

 

베사르타 야샤리의 삼촌 아뎀 야샤리는 순국선열로 추앙을 받고 있다.

아뎀과 그의 동생이자 베사르타의 아버지인 하메즈는 코소보 해방군 편에서 함께 싸웠다.

1998년 3월, 세르비아 경찰은 도녜 프레카제에 있는 이들의 가족용 주거 단지를 공격해 56명을 살해했다.

당시 10살이던 베사르타가 유일한 생존자였다.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보복 차원에서 세르비아 정교회의 교회들을 파괴했다.

14세기 때 프리즈렌에 지어진 성 니콜라스 교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2004년 반세르비아 시위가 발생하면서 훼손됐다.

이는 전쟁 이후에 전국적인 규모로 벌어진 유일한 폭력 사태였다.

 

이바르강은 지금도 발칸반도에 지속되고 있는 민족적 적대감을 반영하듯,

미트로비차를 세르비아계 지역과 알바니아계 지역으로 나눈다.

뉴브리지라는 다리는 이탈리아 평화 유지군이 경비를 맡고 있으며 보행자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2004년, 이곳에서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가 총격전을 벌여,

여덟 명이 죽고 코소보 전역에 극심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1999년 3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이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국경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추위를 버틸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옷가지를 껴입고 최소한의 짐만 챙겨 나왔다.

나토군이 전쟁에 개입한 후 세르비아군은 무자비한 인종 청소 작전을 벌여,

대부분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FRANCESCO ZIZOLA/VII/REDUX

 

한 보스니아 여성이 자코비차에 있는 비영리 기관의 미술 치료실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기관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상담을 제공한다.

신원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이 여성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벌어진 전쟁에서 두 차례 강간을 당했다.

처음에는 보스니아, 나중에는 코소보에서였다.

 

2021년, 국회 의원에 당선된 사란다 보구예브치는,

가족 대부분이 세르비아군에 포위돼 처형당했을 당시 살아남았다.

보구예브치와 그녀의 사촌 세 명은 10대 때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르비아 법정에서 이 잔혹 행위에 대해 증언했다.

 

이 조끼와 신발은 세르비아군에 의해 살해된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의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됐다.

희생자와 관련이 없는 이런 유품들은 프리슈티나에 있는 법의학 연구소에 보관된다.

 

야스미나 요바노비치가 아버지 파운 지브코비치의 한 장뿐인 사진을 들고 있다.

세르비아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페리자이에 있는 한 기술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서류를 회수하러 돌아왔다가 행방불명됐다.

요바노비치는 실종된 세르비아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파악하려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바스피예 크라스니치-굿맨이 푸쉬 코소브에 있는 남동생 집에서 조카 안다와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18년,

그녀는 알바니아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강간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전시에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다.

 

파흐리예 호티(빨간 바지 정장을 입은 사람)가,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하이브>의 프리슈티나 시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세르비아 경찰은 전쟁 중 크루시 에 마데에서 그녀의 남편과 다른 대다수의 남성을 체포했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아직도 행방불명 상태다.

호티는 전쟁 후 살아남기 위해,

마을 여성들과 협동조합을 조직해 첫 사업으로 양봉을 시작했다.

 

린디타 세이디우-루고바는 프리슈티나대학교 문헌학과의 학과장이다.

그녀는 세르비아어를 포함한 발칸 언어 교육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을 재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프로그램의 목표 중 하나는 번역 수준을 향상하고,

코소보의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하는 것이다.

알바니아어와 세르비아어는 모두 코소보의 공용어다.

 

호티가 설립한 협동조합은 양봉업으로 시작했지만,

현지에서 자라는 붉은 피망을 가공하는 것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가공 공장에서는 볶은 피망으로 만든 전통 소스인 아이바르를 생산한다.

호티와 여성들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역민들의 가부장적 태도와 맞서 싸워야 했다.

 

자코비차 출신의 악단인 아쉬케트(‘연인들’이라는 뜻)의 단원들이 CD 음반의 화보 촬영을 위해 모여 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함께 연주해 왔다.

1999년,

이 악단의 단장은 레차크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남성 합창단과 함께 알바니아 국가를 연주했다.

이 장송곡은 비무장 상태에서,

세르비아 보안군에게 살해된 45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온 세르비아인 관광객들이 성 구세주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

이 교회는 1330년경 프리즈렌에 세워졌다.

프리즈렌은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였지만 오늘날에는 이곳에 세르비아인이 거의 살지 않는다.

시난 파샤 모스크(오른쪽)는 오스만 제국이 코소보를 지배하던 1615년에 지어졌다.

 

[과도기의 코소보]

발칸반도에 위치한 작은 국가 코소보는,

1998-1999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으나,

사회 불안을 야기한 채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됐다.

세르비아는 수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다.

세르비아의 일부 지역이었던 코소보는,

현재 독립을 선포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소보에는 약 18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알바니아계와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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