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nah 觀我 Story

[박제영의 꽃香詩향] 물푸레나무 본문

관아觀我Guanah Story

[박제영의 꽃香詩향] 물푸레나무

Guanah·Hugo 2023. 6. 13. 22:02

출처 :  커피통 2019' 호반인문학 | BAND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정년 이후를 대비해서 숲해설사 자격증을 딴 후배가 있습니다.
그 후배랑 골프를 치러 가면 이 친구는 골프보다는 골프장 페어웨이 주변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에 더 관심을 갖더군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친구 덕분에 저도 미처 몰랐던 식물들을 많이 알게 되었으니 두루 두루 좋은 일입니다.
한번은 티샷을 하다 말고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그러는 겁니다.
“형, 이게 무슨 나문지 알아요?” 많이 보던 나무인데,
갑자기 훅하고 치고 들어오니 헷갈리더군요.
“글쎄, 많이 보던 건데… 뭔 나무냐?”
그러자 이 친구 의기양양해서 일장 연설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물푸레나무잖아요.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골프는 뒷전으로 미룬 채 그가 들려준 물푸레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물푸레나무는 산기슭이나 골짜기 물가에서 자란다.
꽃은 흰색인데 원추꽃차례로 무더기로 달린다.
물푸레나무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이 새파랗게 되기 때문에 물푸레나무라고 불린 거다.
그래서 한자로 수청목(水靑木) 혹은 청피목(靑皮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푸레나무는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서 예로부터 곡괭이, 호미, 도끼 등 농기구나 연장의 자루를 만드는 데 쓰였고 창과 같은 무기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조선 시대 태형이라는 형벌에 쓰인 곤장이며 육모 방망이도 물푸레나무로 만들었고,
당시 배를 만들고 수레를 만드는 데도 물푸레나무가 쓰였다.
요즘에는 총기류의 개머리판과 프로야구 선수들이 쓰는 야구 방망이를 만드는 데 주로 물푸레나무가 쓰인다.

물을 좋아하는 그래서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자잘한 흰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솜사탕처럼 덩어리로 자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예전부터 농기구와 연장의 자루로 쓰였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곤장을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는 것도 야구 방망이를 물푸레나무로 만든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숲해설사라는 직업도 은근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故 오규원(1941~2007) 시인의 시 「한 잎의 女子」를 아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모른답니다.
시도 모르고 오규원 시인이 누군지도 모른답니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
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한 잎의 女子」 전문


그래서 이번에는 故 김태정(1963~2011) 시인의 시 「물푸레나무」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모르더군요.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을 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 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 김태정, 「물푸레나무」 전문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양의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아느냐고,
속초 사는 이상국 시인의 시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는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알지만 속초 사는 이상국 시인은 모르겠다고, 당연히 시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이상국,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전문


그래서 물었습니다.
숲해설사 자격증을 따려면 시험을 봐야 하냐고.
당연히 학원에도 다니고 자격시험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숲해설가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지식들을 분야별로 장황하게 늘어놓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나무와 풀과 꽃을 소재로 한 시와 시인들에 관한 공부는 하지 않느냐고.
그런 문제는 시험에 나오지 않느냐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물론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이라는 문장이 실제 물푸레나무의 커다란 잎과는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픔’을 모르고 어찌 물푸레나무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파르스름한 빛이 물푸레라는 이름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모르고 또 어찌 물푸레나무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파르스름한 빛깔이 빚어내는 사랑을 모르고 어찌 물푸레나무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숲해설사들과 시인들과 비교하면 과연 누가 더 숲을 잘 안다 할 수 있을까?
누가 더 나무와 풀과 꽃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무와 풀과 꽃과 숲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그것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날 골프 스코어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날 집에 돌아와서 이런 졸시를 남기긴 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 男子를 모르겠네.
물푸레나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男子,
물푸레나무의 학명부터 이름의 유래며 그 쓰임새까지 물푸레나무의 거의 모든 것에 관하여 알고 있는 그 男子를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네.

나는 그 男子를 정말로 모르겠네.
나무만을 아는 男子,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男子,
숲 해설과 詩는 별개라는 男子,
詩集 같은 것은 시험에 안 나오니 관심 없다는 男子,
그래서 행복하다는 男子.

숲 해설을 위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그런 病身 같은 남자는 세상에 없다는 저 男子.

― 박제영, 「숲해설사-한 잎의 여자를 패러디함」 전문


물푸레나무를 알려면 물푸레나무를 직접 찾아가서 보고 만져보는 게 좋겠지요.
숲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면 더욱 좋겠지요.
거기에 하나를 더하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를 노래한 시편들을 찾아서 읽어보시는 겁니다.

- 월간 《춤》,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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