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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 (Rembrandt)

Guanah·Hugo 2024. 11. 19. 23:33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 (Rembrandt)
국적: 네덜란드, 출생-사망: 1606년~1669년. 사조: 바로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네덜란드어: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술집의 탕자> 렘브란트, 1636년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에스파냐의 벨라스케스와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돌팔매를 당하는 성 스테판> 1625년, 리옹 미술관
 

<골리앗의 머리를 사울 왕에게 넘기는 다윗> 1627년, 바젤 미술관
 

<성 가족> 1645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제분업자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0년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며,
야코브 반 스바넨뷔르흐 아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과 판화를 배웠다.
1624년경부터 독립 화가로 활동했으며,
1630년경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역사화가 피터르 라스트만을 스승으로 모시며 도제들을 가르쳤다.
 

<발람의 당나귀> 파리 코냑 제 박물관

라스트만의 공방에 있던 기간은 약 반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는 렘브란트의 화풍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라스트만의 영향으로 장르적인 구성,
완벽한 데생과 이상적인 인체 표현 등의 고전적인 회화 방식에서 탈피해,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심리 묘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 〈발람의 당나귀〉,
〈토론하는 두 철학자〉,
〈성 베드로의 부인〉 등에서는 라스트만의 화풍이 엿보인다.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

렘브란트는 미술상 헨드릭 윌렌부르흐와 함께 일하면서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1632년 외과의사 조합의 의뢰로 첫 번째 집단 초상화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완성하면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되었다.
튈프 박사의 공개 해부 강연을 그린 이 불멸의 명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이 인물들의 개성을 담아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목욕하는 여인 Woman Bathing in a Stream, 1655.

1634년, 렘브란트는 윌렌부르흐의 조카 사스키아 반 윌렌부르흐와 결혼했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소묘와 유화를 그렸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사스키아〉 등이다.
또 그해에는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하여 독립 장인의 지위를 받았다.
윌렌부르흐에게서 독립한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 수많은 부를 축적했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초상화 주문은 줄을 이었고,
많지는 않지만 성서를 주제로 한 연작과 대작 역사화들도 주문받아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눈이 멀게 된 삼손 The Blinding of Samson, 1636, which Rembrandt gave to Huyghens.

렘브란트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으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대비시켜 입체감을 드러내 그림에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이를 '키아로스쿠로'라고 하는데,
16세기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창안한 것이다.
또한 렘브란트는 독일 화가 아담 엘스하이머의 명암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렘브란트는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많이 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판화를 독학으로 연구할 만큼 판화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다고 한다.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를 모델로 제작한 〈늙은 여인의 흉상〉,
〈늙은 여인의 얼굴〉과 암스테르담 시절에 제작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화가가 판화에 있어서도 특출난 재능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초상화가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평생 그렸던 그답게 사스키아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동판화도 남겼다.
 

The Windmill, 1641, etching.
 

The Three Trees, 1643, etching.

1630년대에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에칭을 여러 점 제작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목동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리다〉 등이다.
그는 에칭에 있어서도 빛과 어둠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가령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는 경우에는 색조를 연하게 사용하거나,
아예 윤곽선을 지우고 형태와 광휘를 드러내도록 색채를 사용하여,
어둠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의 초상> 1633년~1634년, 빌헬름스회에 성, 고전거장회화관.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한 살 된 아들 티투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섯 아이가 태어났으나 살아남은 건 티투스 하나뿐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화가로서의 렘브란트는 완숙기에 접어들어 풍부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야경> 1642년경,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대표작 〈야경〉은 이때 탄생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 길드 클로베니에르 회관이 완공된 기념으로 그려진 단체 초상화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활동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는 기존의 단체 초상화와 달리 극의 한 장면을 보듯 화면을 연출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기 있는 표정과 몸짓,
극적 효과를 더해 주는 명암 대비로 전체 화면에 긴장감과 활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부유한 시민들의 의뢰로 그려진 이 작품은 단체 초상화로서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각기 다른 점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인물이나 명암 효과로 인해 얼굴이 가린 인물이 생긴 게 문제였다.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항의하면서,
이 그림은 후원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렘브란트의 명성도 떨어졌다.
 

Bathsheba at Her Bath, modeled after Hendrickje, 1654

여기에 〈야경〉의 일로 작품 주문이 줄어들었고,
사스키아가 죽기 전 무리하게 집을 장만한 데다 무모하게 투기를 하면서 렘브란트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렘브란트는 사스키아가 죽은 후 집안 하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재혼할 경우 사스키아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게르테라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 렘브란트의 명성은 더욱 떨어졌고,
하녀 헨드리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교회 위원회에 간음죄로 소환되기까지 했다.
헨드리케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다.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1662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채권자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렘브란트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율법의 석판을 깨뜨리는 모세〉,
〈성 베드로의 부인〉, 〈포목상 조합 이사들〉 등의 작품에서,
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였으며,
하녀들과 아들 티투스, 자신을 모델로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웃고 있는 제욱시스> 쾰른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렘브란트만큼 자화상에 매료되어 있던 화가도 없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으며,
말년에는 더욱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자신을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신사로,
때로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표현했다.
예컨대 〈웃고 있는 제욱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늙고 주름진 노파를 그리면서,
웃음을 참았다는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화상>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1658년, 프릭 컬렉션.

렘브란트는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
가난 속에서 죽어 간 늙은 화가의 무덤은 비석 하나 없이 초라했다.
죽을 무렵 렘브란트는 유행에 뒤떨어지고 한물간 잊힌 화가였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하여,
19세기에 네덜란드인이 과거의 황금시대를 돌이켜보며,
네덜란드를 빛낸 천재 화가로 적합한 인물을 찾으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가족의 초상> 1663년~1668년, 헤르초크 안톤 울리히 미술관
 

유노 [Juno], 1662년~1665년, 해머 박물관
 
 

<다나에> 1636년~1647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독수리에게 붙들린 가니메데스> 1635년,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페르세포네의 납치 [The abduction of Proserpina], 1630년~1631년, 베를린 국립 회화관
 

에우로페의 납치 The Abduction of Europa, 1632.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1630년, 월리스 컬렉션
 

<갈릴리 호수의 폭풍> 1633년, 소장처 미상
 

<성 도마의 불신> 1634년, 푸슈킨 미술관
 

다비드와 조나단 [David and Jonathan], 1642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폴란드 기수 [The Polish Rider], 1655년, 프릭 컬렉션.
 

<구약성서에 나온 두 인물의 초상, 일명 "유대인 신부"> 1665년~1669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The Girl in a Picture Frame, 1641, Royal Castle, Warsaw.
 

<황금 투구를 쓴 남자> 1650년, 베를린 국립 회화관
 

성 마태오와 천사 [Saint Mathieu et l'Ange], 1661년, 루브르 박물관
 

Belshassar's Feast, 1636-8
 

<토비트의 가족을 떠나는 대천사 라파엘> 1637년, 루브르 박물관
 

이삭의 희생 Abraham and Isaac, 1634
 

<명상 중인 철학자> 1632년, 루브르 박물관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 1630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Susanna, 1636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1654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detail, c. 1669

<돌아온 탕자>는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았다.
렘브란트가 가장 마지막으로 그린 역사화로 알려져 있다.
성서에 따르면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했고,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
그새 늙어버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나무라는 대신 좋은 옷과 신발,
가락지를 끼워주라 말하며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
이 작품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Ahasuerus and Haman at the Feast of Esther, 1660
 

바타비아인들의 음모 The Conspiracy of Claudius Civilis (cut-down), 1661–62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야곱> 1656년, 카셀 국립 회화관
 

Lucretia, 1666 (Minneapolis Institute of Art)
 

 

<플로라의 모습을 한 헨드리키에> 1654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카디아 옷을 입은 샤스키아> 1635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34세 때의 자화상> 1640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렘브란트 - 빚의 화가, 비즈 화가, 빛의 화가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의 빈민촌. 한 노인이 쓸쓸히 죽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최후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혔던 그가 왜 이런 말년을 맞았을까.
빚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렘브란트는 출생부터 인생 중반까지 풍요 속에서 지냈던 인물.
1606년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덴대학 입학 직후 학업을 접고 화가로 나서 처음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최초의 집단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을 그렸을 즈음에는,
귀족들이 그가 그린초상화를 얻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26세에는 명문가의 딸과 결혼해 명예는 물론 막대한 지참금도 챙겼다.
 
<아틀리에의 화가> 1628년, 보스턴 미술관

문제는 과용. 화구와 고서적, 소도구, 이탈리아 골동품을 구입하는 데 거액을 지출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5층짜리 저택도 은행 대출로 사들였다.
불행은 가정과 금전, 두 측면에서 찾아왔다.
아이 넷 중 셋이 생후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표작 〈야경〉을 완성한 1642년,
아내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63세 때의 자화상> 1669년, 내셔널 갤러리

사별 이후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은행 빚을 못 갚아 1658년에는 저택도 경매에 부쳐졌다.
가난 속에서도 대작을 그려냈지만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이,
27세로 사망(1665)한 뒤 4년 후 영욕의 생을 마감했다.
향년 63세.

굴곡진 삶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미술품 거래 회사를 설립하고 경매 시장을 활성화시켜,
귀족 계층의 전유물이던 예술을 대중화한 선구자라는 분석과 철저한 반시장주의자였다는 해석이 상존한다.
 
엠마오의 만찬 (엠마오의 그리스도), 1629년,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

깊은 신앙심을 지닌 성서 화가였다는 평가의 이면에,
결혼을 요구하는 동거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냉혈한이라는 분석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그를 '빚의 화가', '비즈(사업) 화가'보다는 '빛의 화가'로 기억한다는 점.
렘브란트의 화폭에 새겨진 영롱한 빛의 가격도 갈수록 비싸진다.
---출처: 99%의 롤모델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Rembrandt van Rijn - Self-Portrait.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68위/ 렘브란트 <양손을 허리에 대고 있는 남자> 1658년.
가격: $47,331,000(496억 6000만 원)/ 2014년 기준.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면 그 앞에서 2~3개월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
작업 속도가 느린 이유는 스스로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왕이라고 해도 그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을 것이다.”
-필리포 발디누치(17세기 이탈리아 미술사가)

 

The Landscape with Good Samaritan, 1638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8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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