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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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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Guanah·Hugo 2025. 3. 30. 23:16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Yellow-Red-Blue, 1925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art theorist)이다.
피카소, 마티스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 태생으로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1911년 독일 뮌헨에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여,
표현주의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In Blue, 1925
 
1866년 모스크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인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색, 소리, 언어에 특출한 감각을 보여,
그의 부모는 일찍부터 그에게 미술과 음악을 공부시켰다.
하지만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과 경제학, 민족학을 전공했고,
1892년에 같은 대학교에서 법학 강사가 되었다.

Colorful Life, 1907
 
1896년 뮌헨의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파울 클레,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등,
훗날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많은 예술가를 만났다.
 
1901년 전통적인 미술에 반기를 들고,
팔랑크스’라는 예술 단체를 설립해 미술 교육을 맡았다.
1903년 그의 초기 걸작 〈청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추상적인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Couple Riding, 1906
 
1903년부터 1909년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며 예술적인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1909년 기존 예술에 반대하는 전위적인 미술가 단체인,
뮌헨 신미술가 협회(NKVM)’의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하지만 1911년 자신의 작품이 협회 연례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협회를 탈퇴하여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를 만들었다.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청기사파’는,
체제를 갖춘 조직이라기보다는 유연한 형태의 모임에 가까웠다.

청기사 Der Blaue Reiter, 1903
 
자신들의 예술을 정확히 알리고,
소리와 색채 간의 상징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는 예술을 모색했다.
 
단체의 이름은 칸딘스키 작품에서 온 것이지만
‘말’, ‘푸른색’ 등
다른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이름이었다.
 

The Lyrical, 1911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해체될 때까지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이는 독일을 넘어 유럽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특히 1911년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선과, 색, 구성으로 이루어진 추상 예술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Color Study. Squares with Concentric Circles, 1913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전쟁을 피해,
약 2년 동안 스위스, 스웨덴에서 보낸 그는,
1916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 절대주의 추상 화가들과 교류했다.
 

Moscow. Red Square, 1916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러시아 예술계가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하면서,
칸딘스키의 추상 예술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On White II, 1923

1921년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해,
건축과 응용 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응용 미술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원, 직선, 사각형, 삼각형 등 기하학적인 요소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1926년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점, 선, 면》을 발표하며,
구성주의 추상 미술 예술론을 완성했다.
 

Soft Hard, 1927

1928년 독일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1933년 집권한 나치 정권이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파리 시절 그의 작품은 점차 유기적이고 구상적인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그는 파리에서도 예술 이론 연구와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지만,
입체파, 초현실주의 미술이 대세를 이루며 차츰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멀어져 갔다.
 

Gloomy Situation, 1933
 

Development in Brown, 1933

1933년, 나치 정부는 바우하우스를 ‘퇴폐 미술의 온상’이라고 규정하고 강제로 폐쇄했다.
칸딘스키와 건축가 힐베르스 하이머를 ‘불온한 생각’의 소유자로 여기고,
이들의 해임을 권유했으나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이를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칸딘스키의 작품 수십여 점도 몰수되어 경매에 붙여졌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되자 칸딘스키는,
12월 말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 자리를 잡았다.
 

Sky Blue, 1940

파리에서 칸딘스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그의 작품에서는 색채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형태는 상형문자나 기호들의 집합체 같은 형상을 띠며 더욱 간결해졌는데,
〈매력적인 상승〉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자신의 무의식과 ‘내적 필연성’에 몰두하면서
〈구성Ⅹ〉, 〈은은한 긴장〉, 〈상호의 화음〉, 〈푸른 하늘〉과
같은 작품을 탄생 시켰다.
 

콤퍼지션 Composition IX, 1936

‘내적 필연성’이란 칸딘스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개념으로,
예술에서 ‘대상이 지닌 정신적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딘스키는 ‘예술이란 예술가의 정신적 감정이라는
내적인 요소가 형태라는 외적인 요소를 통해
관람자에게 그와 유사한 정신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콤퍼지션 Composition X, 1939

즉 예술이란 대상을 맹목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해하고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색채나 형태의 미는 예술에 있어 충분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내적 필연성’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주 위에, 1940년

이런 관점에서 그는 색채나 형태가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을 따르기보다는,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수단이 된다고 보았고,
이로써 추상 회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는 추상회화가 주는 감동을 음악에 비유해 표현하기도 했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944년 12월 13일, 칸딘스키는 뇌이쉬르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남긴 작품과 이론들은 후일 미국과 프랑스의 추상 회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20세기 새로운 미술의 영역을 탐구하는 데 지표를 제시했다.

후일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액션 페인팅, 타시즘, 캘리그라피를 비롯한 앵포르멜 회화(informel)가 탄생한다.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Rotterdam Sun, 1906
 

Odessa. Port, 1898
 

Autumn Landscape with Boats, 1908
 

Winter Landscape, 1909
 

Murnau Street With Women, 1908
 

Houses in Munich, 1908
 

Gabriele Münter Painting in Kallmünz, 1903
 

Farewell (Large Version), 1903
 

The Singer, 1903
 

Gabriele Münter, 1905
 

Houses in Murnau on Obermarkt, 1908
 

Improvisation 7, 1910
 

최초의 추상 수채화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 1910
 

The Last Judgment, 1912
 

Improvisation. Deluge, 1913
 

Dreamy., 1913
 

Painting with White Lines, 1913
 

콤퍼지션 Composition VI, 1913
 

콤퍼지션 Composition VII, 1913
 

콤퍼지션 Composition IV, 1911
 

바실리 칸딘스키, <콤퍼지션 5> 캔버스에 유화 / 190×275cm, 1911년.
가격 $40,000,000(419억 7000만 원)

이 그림은 미국의 사업가인 로널드 로더가 사서,
뉴욕 맨해튼에 있는 그의 사립 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로널드 로더는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둘째 아들이다.

주오스트리아 미국 대사를 지내기도 한 그는 유명한 유럽 근대 미술 컬렉터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을
1억 3500만 달러(1416억 4000만 원)에 구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캔버스에 유채 138×138cm 1907년.

그는 그림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오!(Oh!)’, ‘오 마이!(Oh My!)’, ‘오 마이 갓!(Oh My God!)’.
그리고 자신은 이 가운데 ‘오 마이 갓!’에 해당하는 그림만 산다고 한다.
적당히 좋은 그림이 아니라
정말 끝내 주게 좋은 그림만 산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도 ‘오 마이 갓!’급이다.
 

<콤퍼지션 5> 1911년.

실제 이 작품은 추상화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특징을 보여 주는 완벽한 그림이다.
칸딘스키는 완전한 추상화를 처음으로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반 파리를 중심으로 모인 화가들은,
과거의 미술과 결별하는 전위적 스타일의 미술을 했다.
하지만 피카소나 마티스 등 그 누구도 완전한 추상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독일 뮌헨에서 활동하던 칸딘스키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한창이던 1911년에 이미 완전한 추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쇤베르크 음악의 영향이 컸다.
그는 콘서트에서 쇤베르크의 표현주의적 음악을 들은 뒤,
변화가 잦고 다이내믹한 그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추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중 하나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대형 크기(190×275센티미터)나 자유분방한 색,
선의 움직임 등 칸딘스키 추상화가 갖춰야 할 조건을 모두 갖춘 작품이다.
이 작품이 처음 제작된 1911년에는,
크기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전시회에서 거절당했다고 한다.
-출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 이규현 | 알프레드
 

콤퍼지션 Composition VIII, 1923
 

Transverse Line, 1923
 

Circles in a Circle, 1923
 

Black and Violet, 1923
 

Swinging, 1925
 

Blue Segment, 1921
 

In Grey, 1919
 

Orange, 1923
 

Delicate Tension, 1923
 

Dominant Curve, 1936
 

Shine, 1929
 

Contrasting Sounds, 1924
 

Several Circles, 1926
 

Clear Connection, 1925

 

No Title, 1923
 

Deepened Impulse, 1928
 

Upward, 1929
 

Gravitation, 1935
 

Last Watercolour, 1944
 

Thirty,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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