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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 1916년~1956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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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 1916년~1956년)

Guanah·Hugo 2025. 3. 3. 00:18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이중섭(李仲燮, 1916년~1956년)은 일제 강점기,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李仲燮, 1916년~1956년)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흰 소, 이중섭, 1954년경.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이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해와 아이들, 이중섭, 1952년~1953년.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이중섭, 1952년~1953년.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서귀포의 환상, 이중섭, 1951년, 호암미술관.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1954년.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황소, 이중섭, 1953년경.
 

투계 [鬪鷄], 이중섭, 1955년, 국립현대미술관.
 

달과 까마귀, 이중섭, 1954년.
 

부부 [夫婦], 이중섭, 1953년, 국립현대미술관.
 

해변의 가족, 이중섭, 20세기 중반경.
 

가족과 비둘기, 이중섭, 1956년경.
 

아버지와 두 아들, 이중섭.
 

두 어린이와 물고기, 이중섭.
 

파란 게와 어린이, 이중섭.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 1951년, 호암미술관.
 

닭과 어린이, 이중섭.
 

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복사꽃이 핀 마을, 이중섭.
 

새와 나무, 이중섭,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이중섭,
 

도원(桃園), 이중섭, 1953년경.
 

이중섭(李仲燮)은 한국의 서양화가이다.


*작품세계
이중섭은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예민한 감수성과 순진무구함,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일본 유학시 보수적인 관학풍의 경향보다는,
오히려 서구 아방가르드 회화에 깊이 빠지게 했다.
 

싸우는 소, 이중섭.

감정이 실린 격렬한 필치와 강렬한 색감,
날카로운 선묘로 이루어진 독특한 조형세계는,
그가 야수파 화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과 재능은 단순히 서양어법을 모방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를 키워준 향토의 숨결과 희망을 담게 했다.
 

흰 소, 이중섭, 1952년, 호암미술관.

초기 작품에서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그뒤로는 피난시절 가족과의 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 생활일기와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예술세계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삶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이중섭.

그는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나타냈다.
동시에 서양미술의 어법을 완벽하게 소화·흡수하여,
개성적인 조형을 성취함으로써 한국미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

특히 원산에서 그린 현존하는 소묘를 비롯하여,
가족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표현한 후기의 은지화는,
자유자재한 선묘와 심도있는 정서적 표현력을 보인 탁월한 작품이다.
 

봄의 아이들, 이중섭, 1952년~1953년.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이중섭.
 

해바라기와 아이, 이중섭.
 

두 어린이와 복숭아, 이중섭.
 

꽃과 어린이, 이중섭.
 

개구리와 어린이, 이중섭.
 

달밤, 이중섭.
 

엽서, 이중섭.
 

엽서, 이중섭.
 

엽서, 이중섭.
 

길떠나는 가족, 이중섭.
 

활을 쏘는 사람들, 이중섭.
 

꽃과 희동, 이중섭, 1955년.
 

벗꽃 위의 새, 이중섭.
 

물고기와 아이들(은지화), 이중섭, 1950년경,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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