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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년~1840년) 본문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년~1840년)는,
19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풍경화가다.
그는 필리프 오토 룽게와 함께 초기 낭만주의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특히 중기 시대에 제작한 우의적 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중기 시대에 제작한 우의적 풍경화로 유명하다.
미술가로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자연에 대한 성찰이었고,
상징적이고 반고전주의적으로 간주되는 그의 작품은,
자연계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담긴 응답인 것처럼 보였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9세기경, 함부르크 아트센터.
프리드리히가 자주 그린 안개나 눈, 일몰, 달밤의 풍경은,
프리드리히가 자주 그린 안개나 눈, 일몰, 달밤의 풍경은,
색채와 명암이 특유한 종교적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또 지평이 낮은 화면은 형이상적 세계(形而上的世界)를 암시하는 무한히 단조로운 퍼짐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 이 공간 속에 나타나는 범선, 폐허, 참나무 숲, 사람의 뒷모습은,
한편 이 공간 속에 나타나는 범선, 폐허, 참나무 숲, 사람의 뒷모습은,
역사와 문화의 공허함과 그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고뇌를 상징하고 있다.
<달을 응시하는 남자와 여자>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30년~1835년경,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두 남자가 있는 일몰 또는 저녁 풍경>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30~1835년, 에르미타슈 미술관.
<노이브란덴부르크 (아침안개에 싸인 노이브란덴부르크)>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6년~1817년경, 포메른 재단.
<엘베 사암 산의 바위가 있는 풍경>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2~1823년,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아침 [The morning],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0년~1821년, 니더작센 주립박물관.
<달을 응시하는 두 남자>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9년,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창가의 여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2년,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그라이프스발트의 정자 [Gazebo in Griefswald],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년, 뮌헨 알테 피나코텍.
<숲 속의 사냥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4년,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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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Fog],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07년, 빈 미술사 박물관.
<저녁 항구의 배들 (해 진 뒤에)>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8년경,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그라이프스발트 항구의 배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0년,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Seashore by Moonlight (1835–36)
<빙해에서의 난파> 1798년, 함부르크 아트센터.
항해하는 배 [Sailing ship],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5년경, 켐니츠 시립미술관.
바다 위의 월출 [Moonrise over the Sea],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2년, 니콜라 푸생 미술관.
범선 위에서 [On the sailing-vessel],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리젠산맥의 아침>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0~1811년경, 베를린 국립미술관.
<리젠게비르게 (리젠 산맥)의 기억>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35년, 에르미타슈 미술관.
<아그리겐토의 주노 신전>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8년~1830년경, 오스트발 박물관.
Caspar David Friedrich - A Walk at Dusk.
부활절 아침 Easter Morning, 1835년.
*화필을 든 신비주의자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화필을 든 신비주의자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독과 우수에 젖은 풍경,
세상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관념을 표현하며,
‘화필을 든 신비주의자’로 불린다.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형이상학적이며,
그의 작품에서 공간은 형이상학적이며,
인간, 범선, 폐허와 같은 주요 대상들은 역사와 문화의 공허함,
인간의 고뇌를 표현한다.
19세기 독일의 풍경화가 아드리안 루드비히 리히터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신비주의의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신비주의의 짙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에게 지나치게 신비롭거나 낯선 대상은 없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감정을 가능한 높이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1774년 9월 5일 발트 해 연안의 항구 도시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1774년 9월 5일 발트 해 연안의 항구 도시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초 및 비누 제조 사업을 했으며,
루터교 신자로 엄격하고 완고한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에 가족의 죽음을 연이어 경험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양육 방식과 맞물려 그의 성격에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했다.
7세 때 어머니가 죽은 후 형제들과 함께 가정부의 손에서 자랐고,
7세 때 어머니가 죽은 후 형제들과 함께 가정부의 손에서 자랐고,
13세 때는 스케이트를 타다 빙판이 깨져 물속에 빠진 그를,
남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구하려다 익사했으며,
17세 때는 누이 마리아가 병으로 죽었다.
이후 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피셔 지방의 해안> 1807년경,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16세 때 그는 고향의 대학에서 건축가 요한 고트프리트 퀴스토르프에게서 데생과 건축 제도를 배웠으며,
16세 때 그는 고향의 대학에서 건축가 요한 고트프리트 퀴스토르프에게서 데생과 건축 제도를 배웠으며,
20세 무렵 코펜하겐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웠다.
이때 고전주의 양식의 조각품들과 네덜란드의 풍경화에 고무되었으며,
시인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클롭슈토크의 자연에 대한 신비주의적 시각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24세 때 낭만주의의 거점이었던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후 평생 그곳에서 살았고,
24세 때 낭만주의의 거점이었던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후 평생 그곳에서 살았고,
화가 필리프 오토 룽게, 시인 루드비히 티크, 노발리스, 괴테 등과 교류했다.
프리드리히는 신비주의적 견해와 루터파의 경건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프리드리히는 신비주의적 견해와 루터파의 경건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으며,
예술의 영적인 능력을 믿었다.
“인간의 절대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신, 무한이다.
“인간의 절대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신, 무한이다.
애써야 할 것은 예술이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은 무한하며, 예술가의 지식과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묵상실에서 기도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묵상실에서 기도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뤼겐의 백악암 절벽>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5~1826년, 라이프치히 조형예술박물관.
초기에 그는 소묘와 수채화 작품을 주로 그렸으며,
초기에 그는 소묘와 수채화 작품을 주로 그렸으며,
24세 무렵에야 유화를 처음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네덜란드 풍경화의 영향을 받은 〈빙해의 난파선〉이 그 작품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잉크와 수채물감으로 많이 그렸고,
그러나 이후에도 잉크와 수채물감으로 많이 그렸고,
30대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유화 작업을 시작했다.
기본기가 탄탄한 그의 데생 실력은 소묘 작업을 오랫동안 중점적으로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산중의 십자가> 1807년, 드레스덴 노이에 마이스터 갤러리
1807년,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영성이 담긴 최초의 걸작 유화 〈산중의 십자가(테첸 제단화)〉가 탄생했다.
1807년,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영성이 담긴 최초의 걸작 유화 〈산중의 십자가(테첸 제단화)〉가 탄생했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제작한 풍경 습작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산꼭대기에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이렇게 직접 설명했다.
“저 위 정상에 늘 푸른 전나무에 둘러싸여 십자가가 서 있고,
“저 위 정상에 늘 푸른 전나무에 둘러싸여 십자가가 서 있고,
늘 푸른 담쟁이가 십자가를 감고 올라간다.
진홍빛 일몰 속에서 십자가 위의 구세주가 빛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처럼 확고한 반석 위에 서 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한 후,
이 작품은 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한 후,
독일 민족주의가 부흥하던 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으로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 작품으로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해변의 수도승〉,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겨울 풍경〉 등을 제작하면서 그 명성은 굳건해졌다.
이 작품들에도 역시 자연에 대한 세밀한 탐구와 영적 관조가 담겨 있다.
<해변의 수도승> 1808년~1809년경,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과 바닷가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과 바닷가 아래,
수도사 하나가 조그맣게 표현된 〈해변의 수도승〉에서,
그림 속 배경은 화면 밖까지 무한하게 확장되며,
그 안에 배치된 인물은 이와 대비되어 왜소하기 그지없어,
자연과 우주의 광대무변함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1810년, 샤를로텐부르그 궁전.
폐허가 된 고딕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사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폐허가 된 고딕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사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설원에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홀로 서 있고 그 아래 한 남자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겨울 풍경〉
등에서도 풍경화에 종교적인 차원을 더해 고차원적인 영적 세계를 묘사했다.
이 작품들 역시 신성로마제국 해체 이후 발흥한 민족주의적 애국 차원에서 해석되기도 하고,
종교적 우의로 읽히기도 한다.
겨울 풍경 [Winter Landscape], 1811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프리드리히는 주제에 필요하지 않은 풍경을 과감히 생략했으며,
프리드리히는 주제에 필요하지 않은 풍경을 과감히 생략했으며,
화폭의 반 이상을 빈 공간으로 남겨둠으로써 무한한 공간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그려진 풍경들은 우울하고 고독한 한편,
신비롭고, 영적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자문하게 한다.
<무지개가 뜬 풍경> 1810년경, 소장처 미상.
1808년부터 그는 독일 전역을 여행하며 〈무지개가 뜬 산의 풍경〉, 〈리젠게비르게 풍경〉 등을 완성했다.
1808년부터 그는 독일 전역을 여행하며 〈무지개가 뜬 산의 풍경〉, 〈리젠게비르게 풍경〉 등을 완성했다.
특히 1810년에 프로이센 왕가가 〈리젠게르비게 풍경〉을 구입하면서 그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1815년에 다시 발트 해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경험을 토대로
1815년에 다시 발트 해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경험을 토대로
〈항구의 배들〉, 〈도시에 뜨는 달〉,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제작되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9세기경, 함부르크 아트센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한 남자가 안개에 잠겨 있는 산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적막하고 광활하게 펼쳐진 대자연을 홀로 마주보고 선 고독한 인간의 존재,
자연의 숭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경외감이 드러나 있다.
프랑스의 조각가 다비드 당제는 이 작품을 보고,
“프리드리히는 내 영혼을 통째로 뒤흔든 유일한 화가이다.”라고 표현했다.
1816년, 프리드리히는 베를린 아카데미와 드레스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16년, 프리드리히는 베를린 아카데미와 드레스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18년에는 카롤리네 봄버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이 여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프리드리히는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고,
“남자란 아내가 있으면 우스꽝스러워진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의 작품에는 여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다소 따뜻하고 밝은 색조를 사용한다.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 1818년경, 에센 폴크방 박물관.
<뤼겐 섬의 백악암> 1818년경, 오스카르 라인하르트 미술관.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저무는 태양 앞의 여인)>이나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저무는 태양 앞의 여인)>이나
신혼여행 중에 그린 <뤼겐의 백악 절벽>에서 이런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해 그는 노르웨이의 풍경화가 요한 크리스티안 달과
드레스덴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함께 작업하고 전시회를 열었다.
1820년대 중반으로 가면 그는 더욱 절제되고,
차분한 색조를 사용하면서도 한층 강렬한 작품들을 탄생시킨다.
<빙해(북극의 난파선)> 1827년, 함부르크 미술관.
1827년에는 〈빙해(북극의 난파선)〉가 탄생했다.
1827년에는 〈빙해(북극의 난파선)〉가 탄생했다.
이 작품은 북극 서북쪽 항로를 찾아 나선 윌리암 패리 선장의 탐사와 조난에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날카롭게 부서진 빙해와 난파된 배를 통해 자연의 웅대한 힘과
그 앞에 선 인간 존재에 대한 숙고가 담겨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프리드리히가 이따금씩 앓곤 했던 우울증의 영향이 짙게 묻어나 있기도 하다.
<인생의 단계들> 1835년경, 라이프치히 조형예술박물관.
말년에 이르러 프리드리히는,
말년에 이르러 프리드리히는,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함을 암시하는 작품들을 다수 그렸다.
1835년 작 〈인생의 단계들〉이 대표적인데,
다섯 척의 배가 떠 있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어린이, 장년, 노인이 한 화면에 담겨 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배들은 인생이라는 여행을 넌지시 언급하며,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암시한다.
<옛 영웅들의 무덤 (자유를 위한 전쟁의 전사자들 무덤, 아르미니우스의 무덤)> 1812년, 함부르크 아트센터.
1835년 6월, 프리드리히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835년 6월, 프리드리히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팔다리가 마비되어 더 이상 유화 작업을 할 수 없었고,
침대에서 이따금 소묘 작업을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1840년 두 번째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이르러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고,
사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의 조각가 다비드 당제가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의 조각가 다비드 당제가
‘독특한 실존주의적 고독이 묻어나는 작품’,
‘진정한 풍경의 비극을 그린 작가’라고 평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Paul Nash, Totes Meer (Sea of the Dead), 1940–41.
<눈 덮인 오두막>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7년경,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발트 해 바닷가의 십자가 [The Cross Beside The Baltic],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5년, 샤를로텐부르그 궁전.
묘지 입구 [The Cemetery Entrance],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5년경,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신거장회화관.
<아뜰리에에서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2년경, 베를린 국립미술관.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무한한 공간감을 통해 인간의 고뇌, 역사와 문화의 공허함 등을 표현했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무한한 공간감을 통해 인간의 고뇌, 역사와 문화의 공허함 등을 표현했다.
<드레스덴 근처의 언덕과 쟁기로 갈아놓은 들판>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24년경, 함부르크 아트센터.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9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눈 속의 이정표> 1807년,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신거장회화관.
The Oak Tree in the Snow (1829)
Graveyard under Snow (1826)
<테첸 제단화, 전체모습 : 산중의 십자가> 1807년,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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