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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Sisyphus)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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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Sisyphus)

Guanah·Hugo 2025. 6. 14. 17:27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코린토스 시의 창건자(창건 당시의 이름은 에피라였다)이다.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벌로 나중에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시시포스 Sisyphys (1548~1549) by Titian, Prado Museum, Madrid, Spain.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Hypnos and Thanatos: Sleep and His Half-Brother Death, by John William Waterhouse, 1874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시시포스(Sisyphus)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플레이아데스> 엘리후 베더, 188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잃어버린 별(메로페) William-Adolphe Bouguereau - Lost Pleiad (1884)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지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평가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졌을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부조리라고 평가했다.
 

<시시포스 인물관계도>

시시포스는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살모네우스, 아타마스, 크레테우스와 형제이다.
시시포스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한 명인 메로페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 오르니티온, 테르산드로스, 할모스 등 네 아들을 낳았다.
글라우코스는 니소스의 딸 에우리노메와 결혼하여 영웅 벨레로폰을 낳았다.
하지만 벨레로폰은 에우리노메가 해신 포세이돈과 정을 통해서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라에르테스와 안티클레이아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실은 시시포스와 안티클레이아 사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Sisyphus by von Stuck.
 

Sisypher dwarves by Tomasz Moczek [pl] in Wrocław.
 

Sisyphus as a symbol for continuing a senseless war.
Johann Vogel: Meditationes emblematicae de restaurata pace Germaniae, 1649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

작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 발표: 1942.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시시포스)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발견하면서,
그에게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각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철학자이다.


[작품해설]

카뮈는 1936년에 ‘부조리’(l’absurde)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며,
1938년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장르로 이에 대한 성찰을 전개한다.
소설에서는 『이방인』,
연극에서는 『칼리귈라』,
철학적 에세이로는 『시지프의 신화』가 그것이다.

카뮈는 1941년에 『시지프의 신화』를 탈고하고,
1942년 10월에 이 작품을 출판한다.
1948년의 개정 증보판에서는
다른 잡지에 발표한 바 있는 카프카에 관한 글을 추가한다.

1942년에 발표된 『이방인』과 함께 이 책은 카뮈의 명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일종의 감정으로서,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확실한 해답이 없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카뮈는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멜빌, 말로 같은 작가들과 함께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철학자들을 참조한다.

파스칼은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상징하는 무의미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을 인정하는 내기를 걸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에 반해 카뮈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는 내기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제안한다.

카뮈의 사유는 헬레니즘의 철학의 세례를 받고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 속에 사는 지중해 인들의 사유이다.
이는 같은 시기에 발표된 『이방인』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카뮈의 작품들이 어떤 단일한 이론적 통일성을 이룬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해일 것이다.

그리고 『시지프의 신화』를 실존주의의 논고로 간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카뮈에게 인간의 본질은 실존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본질의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둠으로써만
우리는 가장 고차원적인 비극적 정신에 근접할 수 있다.


[작품요약]

「부조리한 추론」 :
자살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문제이다.
인생의 무의미와 부조리에 대한 자각이 반드시 자살을 요구하는가?

우선 카뮈는 인간의 부조리한 조건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 미래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의 확실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범속한 낭만주의를 벗어나서 보면 세계는 낯설고 비인간적인 장소이다.
하지만 부조리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명석함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불합리한 세상이 만날 때 발생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와 대면하려 시도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성을 버리고 신에게 회귀하거나
이성을 고양시켜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사실상 철학적 자살을 저질렀다.

이러한 ‘도약’과 달리 부조리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길은
인간 이성의 욕망과 부조리한 세계의 모순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부조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끊임없이 그것에 대결하고 반항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에게 형이상학적인 자유는 별 의미가 없다.
그는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획득한다.
그는 더 나은 미래나 영원에 대한 기대에 묶여 있지도 않고,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의미를 창조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범속한 규칙들에 대한 자유를 구가한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끌어내는
세 가지 결론은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다.
 

「부조리한 인간」 :
그렇다면 부조리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그 하나의 예는 끊임없이 유혹하는 삶을 사는 돈 후안의 태도이다.
그에 따르면 고귀한 사랑은 없으며 짧게 지속되고 예외적인 사랑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는 연극의 배우가 보여주는 태도가 있다.
등장인물의 인생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자신을 명석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정복자의 방식이 있는데,
그는 영원에 대한 약속 따위를 포기하고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친다.
그는 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갖지 않으면서도 명상보다 행동을 선택한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1872년작.


「부조리한 창작」 :
이 장에서 카뮈는 부조리한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해 탐구한다.
부조리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조리한 예술가는 단지 세상의 여러 면모들을 기술할 뿐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며,
이는 사유에서 나와서 자신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는 ‘테제소설’과는 정반대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과 같은 작품에서 철학적 자살이라는 주제를 탐구하지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작품들에서 결국엔 희망에 이르는 길을 발견해내는데,
이는 진정으로 부조리한 창작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 :
시시포스는 신에게 대적했고
더 이상 인간이 죽을 필요가 없도록 죽음의 신을 쇠사슬로 묶었던 인물이다.
우연히 죽음의 신이 풀려나서 시시포스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시시포스는 속임수를 써서 지하세계로부터 탈출한다.
마침내 그가 붙잡히자,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형벌을 부과한다.
즉 그는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데,
산꼭대기에 닿자마자,
바위가 밑으로 굴러 내리는 것이다.
카뮈는 시시포스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부조리의 영웅으로 간주한다.
그는 죽음을 증오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도록 선고 받았다.
시시포스의 종착점 없는 끊임없는 노동은 현대 노동자들의 삶과 닮았다.
그들도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카뮈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일을 시작하는 시시포스의 상황에 흥미를 느낀다.
이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순간인데,
왜냐하면 시시포스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희망을 갖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멸로써 극복할 수 없는 숙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시포스가 자신의 노동의 부질없음과 운명의 확실성을 깨달을 때,
그는 상황의 부조리를 깨닫고 그것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부록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
카프카의 작품들은 부조리한 상황들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지만,
희망의 희미한 빛을 견지함으로써 부조리한 예술작품으로서는 한계를 보인다.
 

[작품 속의 명문장]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4장 「시지프의 신화」의 한 대목이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시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의식’한다.
명증한 의식으로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을 직시하는 것은 인식의 출발점이자 운명을 넘어서는 계기이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반성적인 습관이나 회피와 대립한다.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프랑스문학, 2013. 11., 김동수, 김한식, 위키미디어 커먼즈)
 
 

<저승에서 시시포스를 지켜보는 페르세포네> 아티카 흑색상도기, 기원전 530년, 국립 고대미술관,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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