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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Caravaggio) 본문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이탈리아어: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년~1610년)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이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잘 표현하였고 근대사실(近代寫實)의 길을 개척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잘 표현하였고 근대사실(近代寫實)의 길을 개척했다.
주요 작품으로 <의심하는 토마>가 유명하다.
의심하는 도마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년~1602년, 포츠담 신궁전.
카라바조는 1584년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카라바조는 1584년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그 후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델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바쿠스> 카라바조, 1593년~1594년, 우피치미술관.
<여자 점쟁이> 16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미술양식을 확립하였는데,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미술양식을 확립하였는데,
우피치미술관의 《바쿠스》, 루브르미술관의 《여자 점쟁이》 《성모의 죽음》,
로마에 있는 산루이지 데이 프란체시성당의 《성마태오의 순교》,
바티칸궁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 《로사리오의 성모》 《나자로의 부활》 등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의 길을 개척하였다.
성모의 죽음 [La Mort de la Vierge], 16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격하게 억제된 빛으로 조명된 만년의 음울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언제나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조형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프란스 할스와 렘브란트 판 레인,
이탈리아적인 조형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프란스 할스와 렘브란트 판 레인,
그리고 초기의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유럽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제자인 에스파냐의 후세페 데 리베라를 통해 살바토르 로자에게 계승되었다.
(두산백과)
<이집트로 피신하는 길의 휴식> 카라바조, 1594년~1596년,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엠마오의 그리스도 [The Supper at Emmaus], 카라바조, 1600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매장> 카라바조, 1602년~1604년, 바티칸 미술관.
<다윗과 골리앗> 1599년
성 마테오의 소명 [Calling of Saint Matthew], 카라바조, 1599년~1600년,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성 마테오의 영감> 카라바조, 1602년,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성 바울의 개종> 카라바조, 1600년~1601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체라시 예배당의 그림 :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0년~1601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카라바조의 절정기
미술가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및 진보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절정기
미술가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및 진보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거칠고 난잡한 미술에 들어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함축적 의미에 매혹되었지만,
교회의 공직자들은 전통적인 화가들의 자기방어적인 과민성과,
보수적인 성직자 및 많은 대중들의 본능적인 저항을 반영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받았던 여러 가지 비난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받았던 여러 가지 비난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의 명성과 수입은 늘어났으며,
그는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사기 시작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절망적인 방랑생활이 끝나고,
그는 추기경과 왕자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여전히 성급하고 방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콘타렐리 예배당의 그림 : 성 마태의 순교> 1599년~1600년,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초기 로마 시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초기 로마 시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 이후 카라바조는 여러 차례 걸쳐 법을 위반했다.
1600년 한 동료 화가는 폭력 사건으로 그를 고발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한 군인에게 부상을 입혔다.
<성 마태오와 천사> 1602년
1603년 또 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1603년 또 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1604년 4월 그는 급사의 얼굴에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사건으로 고발되었으며,
10월에는 로마 수비대에게 돌을 던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으며,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9일에는 애인을 지키려다가,
한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로마의 산타고스티노 성당 카발레티 예배당의 제단화 : 순례자들의 성모> 1603년~1605년, 산타고스티노 성당.
그뒤 1년도 지나지 않아 1606년 5월 29일에 카라바조는,
그뒤 1년도 지나지 않아 1606년 5월 29일에 카라바조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테니스 경기 중 점수 때문에 심한 다툼을 벌이다가,
라누초 톰마소니라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데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겁을 먹고,
카라바조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데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겁을 먹고,
초조한 상태에서 그 도시를 피해,
카라바조 후작의 한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근처의 영지로 피신했다.
<로사리오의 성모> 1606년~1607년, 빈 미술사 박물관.
그뒤 그는 다른 은신처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1607년초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뒤 그는 다른 은신처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1607년초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는 한동안 나폴리에 머물면서 플랑드르의 화가인 루이 팽송을 위하여,
〈로사리오 기도중의 성모 Madonna of the Rosary〉를,
몬테델라미세리코르디아 예배당을 위하여,
그의 후기 걸작들 중 하나인 〈은총을 주제로 한 7편의 작품 The Seven Works of Mercy〉을 그렸다.
이 그림의 어둡고 절박한 분위기는,
이 그림의 어둡고 절박한 분위기는,
틀림없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을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그의 회화양식의 변화를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벰> 1608년, 세인트 존 대성당.
1607년말(또는 1608년초)에 카라바조는,
1607년말(또는 1608년초)에 카라바조는,
몰타 섬을 여행하여 그곳에서 유명한 미술가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하여 여러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교회를 위해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 The Beheading of St. John the Baptist〉였다.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 수도회에서 '정의의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 수도회에서 '정의의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뒤 곧 그가 저지른 죄에 관한 소문이 몰타에 퍼지고,
다시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탈출했다.
<성 루치아의 장례식> 1608년, 성 루치아 성당.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로 피신하여,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로 피신하여,
1608년 10월에 시라쿠사에 도착했으나,
추격받을 것이 두려워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명성이 따랐으며,
그리하여 시라쿠사에서 그는 산타루치아 교회를 위하여,
후기의 비극적인 걸작인,
〈성녀 루치아의 매장 The Burial of St. Lucy〉을 그렸다.
<라자로의 부활> 1609년, 메시나 국립박물관.
<목동들의 경배> 1609년, 메시나 국립박물관.
1609년초에 그는 메시나로 피신하여,
1609년초에 그는 메시나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나사로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Lazarus〉·
〈목자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를 그렸으며,
그뒤에는 팔레르모로 피신하여 그곳의 산로렌초 예배당을 위하여,
〈성 프란체스코와 성 라우렌티우스의 경배 Adoration with St.Francis and St. Lawrence〉를 그렸다.
<성 라우렌시오와 성 프란체스코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 1609년, 산 로렌초 예배당.
카라바조가 도망을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서 그린 작품들 중에는,
카라바조가 도망을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서 그린 작품들 중에는,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구도의 작품들이 몇 점 들어 있다.
구도는 예전보다도 더욱 웅장하지만,
이 작품들은 예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묘사보다,
미묘한 감정 표현과 부드러운 색조로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를 괴롭혔을 것임이 틀림없는 산란한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그를 괴롭혔을 것임이 틀림없는 산란한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이 차분하고 강렬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작품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는데,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는데,
카라바조는 1609년 10월 그가 다시 북쪽의 나폴리로 거처를 옮겼을 때,
로마에서 그를 위하여 중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년~1610년, 보르게세 미술관.
그러나 불운이 그를 덮쳐 그가 어떤 여관 문앞에서,
그러나 불운이 그를 덮쳐 그가 어떤 여관 문앞에서,
공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다.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1610년 7월 배를 타고 교황령 안의 스페인 속령인 포르테르콜레로 갔으나,
잘못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자기를 로마에 데려다줄 배가 자신의 물건을 싣고 이미 떠난 뒤였다.
불행과 극도의 피로가 겹친 데다가 열병이 재발해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가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쓰러진 후 며칠 뒤 37세도 안 된 나이로 죽고 말았다.
<병든 바쿠스> 1593년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1593년~1594년,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에 대한 평가
카라바조는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로 평가된다.
*카라바조에 대한 평가
카라바조는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이전 1세기 동안 미술을 이끌어온,
인간적·종교적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플라톤식 이상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며,
인생은 언제나 일종의 드라마이고,
모든 경험(심지어 신비한 경험조차)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현상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라바조(Caravaggio)
그는 매우 감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는 매우 감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극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들은 순간을 포착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은 당시에는 독특한 것이었으며,
그의 인간관은 당시에는 독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널리 칭찬을 받고 그의 기법이 널리 모방되기는 했지만,
그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다음백과
<성 가족과 세례 요한> 카라바조, 1604년경, 베를린 국립 회화관.
<성모와 허드렛일 하는 사람> 카라바조, 16세기경, 릴 미술관.
<기둥에 묶여 채찍질 당하는 예수> 카라바조, 17세기경, 루앙 미술관.
<고문 받는 예수> 1607년
<성 히에로니무스> 카라바조, 1608년, 세인트 존 대성당.
<글을 쓰는 성 히에로니무스> 카라바조, 1605년~1606년, 보르게세 미술관.
<탈혼에 빠진 성 프란치스코> 1595년
<이삭의 희생> 카라바조, 1594년~1596년, 우피치미술관.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 카라바조, 1607년,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마리아 막달레나> 카라바조, 1594년~1596년,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마사와 막달라마리아> 1598년
<성 세례 요한> 카라바조, 1597년~1598년, 카피톨리니 미술관.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Boy bitten by a Lizard], 카라바조, 1595년~160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박꾼들> 1594년
<음악가들> 1595년
<류트 연주자> 카라바조, 1595년경, 에르미타주 미술관.
<과일 바구니> 카라바조, 1596년,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카라바조, 1595년~1596년,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601년부터 1622년까지 말트 대법관을 지낸 알로프 드 위냐쿠르(1547-1622)와 그의 시종> 1608년, 루브르 박물관.
<승리자 아모르> 카라바조, 1600년경, 베를린 국립 회화관.
<잠자는 큐피드> 1608년
나르키소스 [Narcissus], 카라바조, 1594년~1596년,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메두사>
<성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카라바조, 1607년~161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성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1607년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카라바조, 1598년~1599년, 로마 국립 고전회화관.
The Denial of Saint Peter (1610),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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