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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월요시 편지_964호

Guanah·Hugo 2024. 11. 25. 22:55

출처 :  커피통 2019' 호반인문학 | BAND

 

사라지다

황정산



없어진 한 짝 양말에 관한 말은 아닌
꿈속에서도 마주칠 수 없는
모래 냄새가 나는 말이긴 하나

제 꼬리를 삼키며 숨는
뱀의 이름 같기도 한
그러나 모든 구멍들을 채울 수 없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한

연을 날리다 하늘을 본 사람들은 아는 말이지만
알을 낳는 새에 대한 말은 아닌

둔중한 것들이 용적을 비우고
차지하는 것들이 바람에 실리고
불리웠던 것들이 이름을 감추고

사라진다
그렇게 살아진다

- 『거푸집의 국적』(상상인, 2024)
 

***
황정산의 첫 시집 『거푸집의 국적』을 지난 주 틈틈이 읽었습니다.
문학평론가 그러니까 말을 분해하는 황정산보다 시인,
그러니까 말을 조립하는 황정산을 읽는 즐거움이 훨씬 크더군요.

"모든 말은 원래 동사였다
/ 움직이는 것들이 굳어 명사가 된다
/ 아직 굳지 못한 기억
/ 동사로 남아 꿈틀댄다"
(「시인의 말」)

이렇게 시작한 시집은

"1부. 블랙
/ 2부. 시인 시점
/ 3부. 어처구니의 행방
/ 4부. 불량한 시
/ 5부. 동사들"

이렇게 다섯 개의 틀(거푸집)로 조립됩니다.

그리고 오늘 띄우는 시는 당연히(?)
<5부. 동사들>에 들어 있겠지요.

- 사라지다

"사라지다"라는 동사가
슬그머니 혹은 어처구니없이
"살아진다"라는 동사로
부지불식간에 바뀌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사라진다 그렇게 살아진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일생을 시인은 단 한 줄로 요약합니다.

기가 막힌 말의 조립입니다.

그가 말하길,
모든 "사물들"이 본래 "동사들"이랍니다.

곰곰 생각하면 맞습니다.
고정불변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사였던 사물을 명사로 만든 건
어쩌면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시집은 말을 조립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당분간 곁에 두고 틈틈이 그의 레시피들을 분해해봐야겠습니다.


2024. 11. 25.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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