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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놀데(Emil Nolde) (독일: 1867년~1956년, 사조: 표현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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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놀데(Emil Nolde) (독일: 1867년~1956년, 사조: 표현주의)

Guanah·Hugo 2024. 11. 13. 07:39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에밀 놀데(Emil Nolde, 1867년~1956년)는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판화가·수채화가로,
본명은 에밀 한센(Emil Hansen)이다.
격정적인 종교화와 불길한 분위기를 담은 풍경화로 유명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시절 목각사로 일하며 생활했다.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던 때는 그 초기 작품 중 몇 점이 엽서로 제작되어 팔렸을 때 뿐이었다.
파리에서 표현주의 화풍과 유사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6년 브뤼케파에 가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드레스덴에 근거지를 둔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모임인 이 단체는,
놀데의 '색채의 폭풍'(Storm of Colour)을 극찬했지만,
직관적인 외톨이 화가 놀데는 1년 반 뒤 결속이 강했던 이 단체를 탈퇴했다.
 

<황금 송아지를 에워싼 춤> 1910년.

종교에 열광하고 죄의식에 괴로워한 그는,
<황금 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en Calf>(1910,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국립회화미술관)·
<알렉산드리아 항구 In the Port of Alexandria>와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전설 - 이집트의 성모 마리아(사막에서 죽음) > 1912년
 

Saint Mary of egypt, 1911
 

<알렉산드리아 항구 In the Port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 항구 In the Port of Alexandria>는,
연작 <이집트인 성모 마리아의 전설 The Legend of St. Maria Aegyptica>(1912, 함부르크 미술관) 중의 하나인데,
이 연작은 등장인물들의 에로틱한 광란,
그리고 악마 같고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들을 거친 도안과 조화되지 않는 색조로 그렸다.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

9폭의 폴립티크(polyptych:성단의 배후 등에 4패 이상의 패널을 이어 맞춘 화상)인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Christ>(1911~12, 제뷜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중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에는 예수의 상처를 보고 도마가 느끼는 경건한 두려움을 통해 종교적 회의에서 벗어나려는 그 자신의 고민이 표현되어 있다.
 

<무희 Dancer> 1913년

1913~14년 그는 민족학 탐험대의 일원으로 동인도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소박한 신앙에 감명을 받고,
그 느낌을 석판화 <무희 Dancer>(1913)에 표현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놀데는 독일의 발트 해 연안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안개 자욱한 그 지방에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껴,
<습지 정경 Marsh Landscape>(1916, 스위스 바젤 미술관) 같은 작품을 그렸는데,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낮은 수평선이 장엄한 느낌을 준다.
 

폭풍우 치는 바다 [Stormy sea]

1916년 이후에 그린 풍경화는 초기 작품보다 전반적으로 더 차가운 색조를 띤다.
그러나 능숙하게 그린 꽃 그림들은 초기 작품의 화려한 채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판화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특히 거칠게 새긴 목판화의 강한 흑백 효과가 뛰어나다.
 

Flower Garden, 1908

놀데는 처음에 나치를 지지했는데 나치는 정권을 잡자 그의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작품활동을 중지시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전의 주제를 반복하는 데 그쳤다.
 

Self-Portrait by Emil Nolde, 1947

마지막 작품인 <자화상 Self-Portrait>(1947, 제뷜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에는,
여전히 힘찬 화필의 자취가 남아 있기는 해도 만년에 노예술가의 식어버린 열정이 여실하다.
-다음백과
 

<촛불의 무희들> 1912년
 

<삐에로와 여인들> 1917년
 

El entusiasta. Emil Nolde
 

In The Lemon Grove Artwork by Emil Nolde
 

<실낙원> 1921년
 

Emil Nolde(1867~1956), Indische Tänzerin.
 

<무희가 있는 정물화> 1914년

이 그림은 에밀 놀데가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Strange Man with Three Nude Women (Semi-Nude), between 1938~1945
 

<가면> 1911년
 

<원주민> 1914년
 

<선교사> 1912년
 

<군인> 1913년
 

 

<소년과 큰새> 1912년
 

<달빛이 흐르는 밤> 1914년
 

<거룩한 불> 1940년
 

Rote und gelbe Sonnenblumen.
 

Emil Nolde(1867~1956), Sunflowers, 1917
 

Emil Nolde (1867~1956), Begonien (Rot und Gelb) , 1929
 

Blumengarten, 1922
 

Emil Nolde(1867~1956), Excited People.
 

Emil Nolde (1867~1956), Christus in der Unterwelt, 1911
 

열두 살의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서 ), 1911년, 제뷜 놀데 재단 소장.

어린 그리스도의 머릿결과 그의 후광에서 강하게 발산되는 노랑은 어쩐지 불안하다.
혁명가 예수의 미래를 그리고자 한 것일까?...
예수의 뒤에 드리워진 음산한 그림자는 예수가 떠안아야 할 짐인 듯 무겁기만 하다.
 

에밀 놀데, <예수와 어린이들> 1910년

"나는 나의 작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Emil Nolde

표현주의에 속하는 작품의 특징은 작품의 주제 자체가 아니라,
주제에 대한 작가개인의 감수성과 심리적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놀데는 1906년에서 1907년까지 독일의 표현주의 화파인 다리파에 합류했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한 어느 화가보다도,
다리파가 추구하던 예술적 지향점을 가장 잘 그려낸 화가로 평가 받는다.

놀데(Emil Nolde,1867.8.7~1956.4.15)는 현대화에 따른 대중과 사회적 문제보다는,
인간 본연의 본질성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놀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과 종교에 대한 생각,
정열적인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려내고 싶어 했다.

이러한 놀데의 근원적인 표현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것은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색채였다.
 

에밀 놀데, <오순절> 1909년

 

에밀 놀데, <매장> 1915년
 

Emil Nolde(1867~1956)의 작품.


현대적인 표현주의 양식의 종교화를 그리다.

다리파와 결별한 놀데는 1909년부터 약 20여점의 종교화를 제작하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그림들이다.
놀데의 종교화는 비록 그 자신은 신앙심으로 인한 열정으로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배를 자아내는 성스러운 기존의 종교화와는 거리가 멀다.
 

에밀 놀데, <성스러운 밤>, 1912년, 놀데 재단소장.

종교화에 있어서 ‘예수의 탄생’, ‘십자가형’, ‘최후의 만찬’은 매우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소재로,
그 제목만으로도 관람자는 작품에 대한 예상과 경외심을 갖게 되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놀데의 종교화를 보자.
그 주제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표현방법은 너무나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루벤스, <십자가형> 1620경,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에밀 놀데, <십자가에 못 박힘> 1912년, 놀데 재단소장.

<십자가에 못 박힘>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두 명의 죄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유대인의 왕’이란 조롱 섞인 죄패를 붙이고,
예수의 옷가지로 제비뽑기 장난을 하는 군인들,
그리고 슬퍼하는 마리아와 여인들.
모두 성서에 나온 실제 인물들과 이야기로 충실하게 재구성 된 것이다.

10여명의 인물로 꽉 채워진 캔버스.
풍경은 고사하고 원근법도 무시된 답답한 배경의 구도와 마치 가면을 쓴 듯,
고통으로 일그러진 앙상한 예수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 압박감이 들게 하여 예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7,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 460 x 880 cm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에밀 놀데, <최후의 만찬> 1909년,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놀데의 <최후의 만찬>은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너무도 다른 느낌이다.
거칠고 투박하고 빈곤하게 묘사된 예수와 제자들.
이것은 차라리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가깝다.

<십자가에 못 박힘>과 마찬가지로 매우 협소한 장소에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모여 있는 예수와 제자들은,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우리는 성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광기어린 작품으로 ‘사악한 악마의 그림’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던 놀데이지만,
현대회화의 종교미술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화가 중의 한명임은 분명하다.
 

Emil Nolde (1867~1956), Encounter on the Beach, 1920
 

에밀 놀데, 파푸아 청년 [Papuan youth], 1914년.

또 다른 그림

놀데하면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형태의 기괴한 작품들로 대표되지만,
꽃과 바다를 주제로 한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수채화도 다수 남겼다.
 

Emil Nolde (1867~1956), Leuchtende Sonnenblumen, 1950

놀데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꽃은 단순한 정물이 아닌,
놀데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투영한 상징물로서 생기와 활력을 의미하는 동시에 덧없음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놀데의 ‘’은 그자체의 물성을 넘어선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을 담고 있는 것이다.
 

Emil Nolde (1867~1956), Large Poppies, 1942

놀데는 특히 양귀비를 많이 그렸는데,
아마도 타오르는 듯 한 붉은 컬러가 표현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품은 자신의 자아를 은유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부터 전원 속에서 은둔하며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이어간 놀데.
그는 한때 나치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놀데의 그림 속에 표현된 정신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투사를 위험하게 본 나치는,
오히려 놀데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지정하여 작품 활동을 금지한다.

나치의 탄압 후에는 교류하던 작과들과의 교류도 일체 끊고 고독하게 남은여생을 보내고,
1956년에 생을 마감한다.
놀데가 죽기 바로 얼마 전 독일은 그의 현대 독일 회화에서의 독자적인 위치를 인정해 일반 시민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인 독일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전정은(미술 칼럼가)/ J플러스, 2015/04/08 10:36
 

Emil Nolde (1867~1956), Two Dancers (redheard and Blonde)
 

Emil Nolde (1867~1956), Costumed Couple.
 

Emil Nolde (1867~1956)의 작품.
 

Emil Nolde (1867~1956)의 작품.
 

에밀 놀데(Emil Nolde), 국적: 독일/ 출생-사망: 1867년~1956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로 1956년 독일 공로 훈장을 받았다.
자연에 대한 깊은 신앙과 넓은 붓질로 물감을 두껍게 칠한 강렬한 색채의 연속이 작품의 특징이다.
표현주의 화가들의 모임인 브뤼케파에 가입했으나 18개월 후 탈퇴하였고,
주로 빛과 바다를 주제로 수채화 그림을 그렸다.
 

Self-Portrait by Emil Nolde, 1917

*표현주의 미술

회화에 있어 표현주의자들은 회화의 선이나 형태, 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을 위해서만 이용하고,
균형과 아름다움은 무시하였다.
또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왜곡을 즐겨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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