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nah 觀我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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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觀我Guanah Story

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Guanah·Hugo 2024. 10. 1. 10:26

출처 :  미술로 여는 세상 | BAND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년
 
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국적: 네덜란드,
출생-사망: 1853년~1890년,
사조: 후기인상주의, 선명한 색채와 거칠지만 독특한 표현으로 오늘날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영혼의 화가, 빛의 화가,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의 그림을 팔았을 만큼 무명이었고,
궁핍과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런 생을 살다 사후 재평가된,
시대를 앞서 나간 천재 예술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
 
 

해바라기 [Sunflowers], 188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던 테오도루스 반 고흐이고,
어머니는 안나 코르넬리아다.

16세가 되던 해,
고흐는 화상이던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수습 화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화상은 당시 장래가 유망한 직업이었으나 고흐는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손님들과 종종 다투었고,
하숙집 주인 딸을 짝사랑하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해고되었다.
해고된 후에는 견습 교사, 서점 점원 등을 전전했다.
이처럼 힘든 시기에 고흐가 마음으로 의지했던 것은 종교와 그림이었다.
고흐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어서 고흐는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선교사로 일했으나 6개월 뒤에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무보수로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네 살 아래인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에 의지하게 되었다.
화상으로 일하던 테오는 평생 형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흐가 그림을 계속 그리는 데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7세가 된 고흐는 테오의 제안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가의 길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고흐는 1880년 테오의 주선으로 헤이그로 갔다.
여기서 화가 안톤 모브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으나,
그림에 대한 견해차로 얼마 후 나왔다.
1885년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미술학교에 등록했으나 몇 달 만에 퇴학당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고흐는 고향집 목사관 부속 건물에 자리를 잡고 홀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루이스달 등 좋아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공감하고 연대감을 느끼면서 양식화된 미를 표현하는 것보다,
진실성을 드러내고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감자 먹는 사람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이때 완성한 대표작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농부 가족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은 잘못된 인체 비례, 구성의 결함, 과장된 얼굴 묘사 등 회화적 기교가 부족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며,
고흐만의 거칠지만 독특한 붓질 표현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등불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할 때 쓰는 그 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손을 강조한 건 그들이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가 몰두하고 있던 주제와 화가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신발 [A Pair of Shoes], 1886년, 반 고흐 미술관.

1885년 10월 말, 고흐는 고향을 떠났다.
고흐의 충동적인 태도에 반감을 가졌던 이웃 사람들이 지난 3월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고흐를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이후 고흐는 안트베르펜에 잠시 체류한 뒤 1886년에 파리로 올라왔다.
고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과 깊은 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조차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파리에서 고흐는 모네, 르누아르, 쇠라 등의 작품을 접하고 인상주의가 지닌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영향을 받은 화가는 폴 고갱과 들라크루아였다.
구필 화랑의 지배인으로 있던 테오가 연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서 고흐는 무명 화가였던 고갱을 만났다.
당시 고갱은 강렬한 색채를 균일하고 표현적으로 사용하는 양식을 개발하던 중이었다.
 

<탕기 영감의 초상> 파리 로댕 미술관

이 시기에 고흐가 강렬하게 매혹된 또 다른 것은 일본 판화 우키요에였다.
고흐는 색채 표현에 몰두하고 물감을 다루는 방식을 습득했다.
색채의 자율성을 주장한 들라크루아의 색채 이론을 공부하면서 색채 대조 기법을 개발했고,
색과 붓놀림을 대담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고흐는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푸른색 등 강렬한 원색을 대담하게 구사했는데,
그에게 색채란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자연의 색이 아니라,
자신의 격렬한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표현주의적 도구였다.

1887년, 고흐는 툴루즈 로트레크,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등과 함께 레스토랑 샬레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
고흐의 소란스러운 행동이 동생 테오의 사회생활에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년,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
 

<붓꽃이 있는 아를 풍경> 1888년, 반 고흐 미술관.

1888년 2월,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떠났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면 늘 그랬듯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중해 특유의 온화한 기후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를에서 자신의 작품의 본질인 강렬하고 따뜻한 색채와 초기에 영감을 받았던 농촌 소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동생 빌레미나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아를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붙잡기만 하면 된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년,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소장

오늘날 널리 알려진 고흐의 작품 대부분은 이 시기에 그려졌다.
이때 전형적인 고흐의 그림으로 보이는 화법을 개발한 것이다.
고흐는 론 강 유역의 밀밭과 포도밭, 운하, 밤의 거리 등을 걸으며 남프랑스의 풍경에 심취했는데,
이는 그가 대상의 자연색이 아니라,
각각의 그림을 위해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한 색을 사용하는 특유의 기법을 완성할 수 있게 했다.

에게 색은 대상의 모습을 그리는 수단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내는 개인적 표현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붓 자국 역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가 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표현 기법이었다.

"색채의 위치를 정할 때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인다.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만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는 더 이상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형태에 있어서는 ‘나는 내가 그린 형태가 정확하지 못해 실제와 다를까 봐 겁이 난다’라고 썼다.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습작을 할 때도 정확하고 꼼꼼하게 드로잉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효과를 생각하여 선택한 색을 입혔다.
그는 작품 속에서 대상을 종종 심하게 변형시키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로,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노란집> 188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해바라기>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내성적이고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음울해 보이는 고흐는 이곳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모든 풍경도 주변이 냉담하자 점차 시들해졌다.
고흐는 파리에서 꿈꾸다 실패했던 ‘화가들의 공동체 생활’을 다시 꿈꾸며,
테오에게 고갱을 설득해 아를로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동 화실인 노란 집을 꾸미면서 기대에 가득 찬 고흐는,
〈해바라기〉 연작과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침실〉을 그렸다.
침실에 그려진 두 개의 의자, 두 개의 액자, 두 개의 그림에는,
고갱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리는 고흐의 부푼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침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지만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고,
고갱이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고흐는 고갱에게 딱 달라붙어 자신이 그린 것들을 보여 주고 토론하고 싶어 했는데,
고갱은 그의 태도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기대가 깨진 고흐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갱에게 집착했고,
고갱이 떠날 것을 두려워했다.
잠을 자는 사이에 고갱이 떠날까 봐 한밤중에도 몇 번이고 고갱의 침실을 들여다봤을 정도였다.
 
 

<폴 고갱의 의자 (빈 의자)> 1888년, 반 고흐 미술관.

어느 날 고갱이 밤 산책을 나갈 때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그의 뒤를 쫓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워진 고갱은 고흐를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낸 뒤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를 발견했다.
그동안 고흐의 병증 때문에 머물렀던 고갱은 이로써 완전히 질려 고흐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아를을 떠났다.
 

<귀가 잘린 자화상> 1889년, 코톨드 미술관.

이 사건으로 고흐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고갱을 잃은 슬픔을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으로 표현했다.
병원에 갇힌 동안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삶의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아를의 정원> 1888년, 골드슈미트 컬렉션

1889년, 36세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는 1년여를 이곳에서 지내면서 〈붓꽃〉,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른 밀밭〉, 〈올리브밭〉,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리며 서서히 자신감을 찾았다.
그러나 발작은 계속되었고, 우울증과 환상, 피해망상, 정신착란에 시달렸다.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1889년, 뉴욕 현대미술관.

1890년 9월, 고흐는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의 제안으로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 갔다.
박사의 치료를 받으며 작업에 몰두한 그는 매일 한두 점씩 그림을 그리는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던 슬픔과 고독,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흐의 동생 '테오'의 초상화>

더구나 그를 일생 후원해 주었던 동생 테오가,
자신 때문에 가정생활과 재정적 측면에서 곤란을 겪자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1890년 7월 29일 밤, 그는 들판에 나가 권총 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이틀 후 머물던 여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오베르에 쓰였다.
고흐가 죽고 1년 후 동생 테오도 사망했으며,
테오도 그의 옆에 묻혔다.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La nuit étoilée, Arles], 19세기경, 오르세 미술관.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Café Terrace, Place du Forum, Arles], 1888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밤의 카페 풍경> 1888년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 1890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두 여인이 있는 삼나무> 1889년
 

 

Cypresses, 1889.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생트 마리 해변의 고깃배> 19세기 후반경, 반 고흐 미술관.
 

<생트 마리 바다 위의 보트> 1888년, 푸슈킨 미술관.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뷔를레 컬렉션.
 

<씨뿌리는 사람> 1888년
 

Orchard in Blossom, Bordered by Cypresses, April, 1888. Kröller-Müller Museum, Otterlo, Netherlands.
 
 

The Pink Orchard also Orchard with Blossoming Apricot Trees, March 1888.
 

Almond Blossom, 1890. Van Gogh Museum, Amsterdam.
 

<개양귀비와 종달새가 있는 밀밭> 1887년, 반 고흐 미술관.
 

붓꽃 [Irises], 1889년, 폴 게티 미술관.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 1887년, 반 고흐 미술관.
 

The Old Mill, 1888.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ew York
 

<오베르의 거리> 1890년
 
 

<오베르의 교회>1890년, 오르세 미술관.

오베르 시절 제작한 이 작품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고흐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는 누에넨에 있던 버려진 교회탑의 느낌을 그림에 불어넣었다.
고흐는 여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색채는 표현적일수록 더욱 화려하지."
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 표현적이며 화려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푸른 색과 하늘색으로 채색된 천둥이 칠 듯한 하늘은 불길한 예감을 주고 있다.
 

 

<랑글루아 다리> 1888년, 개인
 

<아를의 원형경기장> 1888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아를의 여인들 [Ladies of Arles], 1888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오귀스틴 룰랭의 초상 (유모)> 1889년, 보스턴 미술관.
 

자살하기 얼마 전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 첫째 판.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1888년, 보스턴 미술관.
 

영원의 문턱에서 [On the Threshold of Eternity], 1890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슬픔> 1882년, 석판화, 38.5×29cm, 반 고흐 미술관 소장.
 

Henri de Toulouse-Lautrec, Portrait of Vincent van Gogh, 1887, pastel drawing, Van Gogh Museum, Amsterdam.
 

 

<일본풍: 오이란(게사이 에이센 모작)> 1887년, 반 고흐 미술관.
 

<일본풍: 꽃이 핀 오얏나무(히로시게 모작)> 1887년, 반 고흐 미술관.
 

<협죽도가 있는 정물> 188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청동꽃병에 담긴 왕관초가 있는 정물> 1887년, 오르세 미술관.
 

<데이지와 아네모네를 꽂은 꽃병의 정물> 1887년, 크뢸러뮐러 미술관.
 

<붉은 글라디올러스가 있는 정물> 1886년, 개인.
 

자화상 [Self-Portrait],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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